송시열이 반한 절경 속에 남은 인문학의 보고
우암 수제자 수암 구곡 설정…민진원 글자 새겨넣어 탄생
우암 후학들 순례지로 여겨…문화재청 2014년 명승 지정

제1곡 경천벽

#화양천의 절경 화양구곡은 어떤 곳인가?

화양천은 청화산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서쪽 능선 아래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에서 발원한다. 북쪽으로 흘러 괴산군 청천면 이평리를 지나 송면리에 이르러 관평천을 아우른다. 그리고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화양리를 지나며 절경을 이루어낸다. 조선 효종-숙종 때 정치가 우암 송시열이 1666년 8월 화양천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화양계당(華陽溪堂)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그 제자가 수암 권상하와 장암 정호 등이다.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은 1695년 화양동서원을 짓고 원장으로 화양동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주자가 설정한 무이구곡을 모방해 하류에서 상류로 따라 올라가면서 화양구곡을 설정했다. 그리고 단암 민진원이 그곳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제1곡: 경천벽(擎天壁), 제2곡: 운영담(雲影潭),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4곡: 금사담(金沙潭),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巖),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 파천(巴串).

그 후 화양구곡은 우암의 후학들에 의해 일종의 순례지로 여겨졌다. 그들은 화양동을 찾아 산수를 감상하며 호연지기를 기르고 가무를 즐겼다. 그리고 화양동서원을 찾아 충과 의를 공부하고 도덕과 윤리를 논했다. 이들이 남긴 문화유산과 시문이 화양동을 인문학의 보고로 만들었다. 문화유산으로는 화양동서원, 만동묘, 암서재, 곳곳에 새긴 암각자가 있다. 그리고 문화재청에서는 2014년 8월 화양구곡을 명승으로 지정했다. 그것은 화양구곡의 자연유산적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화양동과 화양구곡을 노래한 시들

구름 그림자 드리우는 못이라는 뜻의 제2곡 '운영담'

화양구곡을 찾아가는 길은 화양천 하류 화양교에서 시작한다. 청천에서 송면으로 이어지는 32번 지방도 화양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으로 벗어나면, 하류쪽으로 화양동 야영장이 있고, 상류쪽으로 화양구곡이 펼쳐진다. 화양구곡을 찾아 올라가는 화양동길은 화양천에 놓인 두 개의 다리를 건너 충청북도 자연학습원까지 이어진다. 화양동 여름파출소를 지나 상류로 150m쯤 올라가면 개울 건너편에 화양구곡의 제1곡 경천벽이 나타난다.

경천벽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절벽이라는 뜻이다. 화양천의 하류라 개울의 폭이 넓고, 푸른 절벽이 소나무와 어우러져 젊은이들이 호연지기를 키우기 좋다. 경천벽 왼쪽 바위에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각자가 있다. 이를 통해 경천벽이 화양동 입구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곡 운영담은 화양2교를 통해 화양천을 건너면 왼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운영담은 구름 그림자 드리우는 못이라는 뜻으로, 세 개의 바위 절벽이 물에 비쳐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준다. 오른쪽 바위 아래 운영담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주자(朱子)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나오는 시구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뜻이다.

제3곡은 화양동서원 앞에 있는 읍궁암이다. 우암 선생이 1659년 효종임금의 죽음을 슬퍼해 통곡하던 바위라고 한다. 바위 남쪽 길가에 네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것이 읍궁암비다. 이 비석은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가 1717년 처음 세웠으며, 비문은 수암 권상하가 썼다. 비문은 읍궁암의 역사와 사연을 적고, 그 끝에 우암의 오언절구를 인용했다.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此日知何日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孤衷上帝臨
새벽이 되도록 통곡한 연후에, 侵晨痛哭後
또 다시 엎드려 무릎 꿇고 탄식하노라. 抱膝更長吟


 

#금사담과 첨성대 그리고 채운사에 얽힌 사연들

제4곡 금사담과 암서재.

제4곡은 금사담이다. 금사담은 금모래, 물, 바위로 이루어진 절경이다. 그리고 건너편 바위 위에는 우암이 거처하던 암서재가 있다. 그 때문에 화양구곡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 금사담이다. 금사담 바위에는 수많은 각자가 있다. 첫 번째 눈에 띄는 것이 전서체의 금사담(金沙潭)이다.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자도 보이고,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창오산에 구름 끊어지고 무이산도 텅 비었다'는 뜻이다. 세월무상을 노래했다.

제5곡 첨성대는 화양3교 오른쪽 물가에서 조금 떨어져 산쪽에 있는 높고 우뚝한 바위다. 첨성이란 현대적인 의미에서 별을 관측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별을 우러러본다는 의미다. 이 때 별은 나랏님 또는 황제를 말한다. 그래선지 첨성대와 그 주변 바위에 조선의 왕과 중국 황제가 쓴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첨성대 북쪽 벽에 만절필동 화양서원(萬折必東 華陽書院)이 있다.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만절필동은 선조 소경(昭敬)대왕 어필이다. 화양서원은 숙종 원효(元孝)대왕 어필이다.

첨성대 아래 개울가 낮은 바위벽에는 비례부동(非禮不動)과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례부동은 명나라 숭정황제 어필이다. 이 글씨는 상서(尙書) 민정중(閔鼎重)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가서 구해온 것이다. 화양동에 거처하고 있던 우암이 1671년 이것을 받아 보관하다 1674년 3월 바위에 새겼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사대사상의 극치를 보여준다. 온 세상이 위대한 명나라 것이고 해와 달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것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하다. 우암의 글씨로, 바위에 새기도록 한 것은 수암 권상하다. 이것을 중국을 존경하며 절의를 지킨다(尊周節義)는 말로 포장을 했으니, 지나치게 수구적이고 과거지향적이다.
 

#와룡대와 학소대 지나 파천에서 끝나는 구곡

물길이 소용돌이치며 양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있는 널찍한 바위 제9곡 '파천'

제6곡 능운대는 말 그대로 구름 위로 솟은 바위를 말한다. 그러나 현재는 채운사가 능운대 뒤에 있어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는다. 능운대 앞에는 휴게소가 있어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제7곡은 와룡암이다. 와룡암은 말 그대로 용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길쪽의 바위 일부가 묻혀 옛 모습만 못하다. 물가쪽 바위 위에 와룡암이라는 각자가 선명하다. 권진응은 와룡암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육곡 기이한 암석이 푸른 물굽이 베고 누워 六曲奇岩枕綠灣
겹겹이 구름 드리운 나무들 속세와 격리되었네. 重重雲樹隔塵關
날씨는 쨍쨍 짙은 녹음은 늘어졌는데 天時群陰剝
물웅덩이 잠룡이 절로 한가로이 누워 있네. 潭底潛龍臥自閒

 

제8곡 학소대는 물 건너편에 있다. 학이 집을 짓는 바위로 물가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다. 다행히 개울에 철다리가 놓여 건너갈 수 있다. 화양구곡의 마지막은 제9곡 파천이다. 파천은 물길이 소용돌이치며 양쪽으로 갈라지는 곳에 있는 널찍한 바위다. 넓은 바위 위에 패인 작은 웅덩이로 물이 흘러갈 때면 그것이 마치 용의 비늘처럼 느껴진다. / 이상기 충북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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