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 235호로 지정돼 있는 보은 삼년산성은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성 가운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신라 자비왕 13년에 쌓고 486년에 다시 수축한 삼년산성은 둘레 1.7km, 성벽너비 12m, 높이 12~18m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이다.
 이 산성은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쌓고 그 사이를 돌로 채우는 이른바 협축(夾築)산성의 전형적 형태로 견고함은 물론, 단순히 성벽 높이로만 따지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능가한다. 또한 성문의 구조도 아주 특이하다. 지난 1980년 수해때 문터가 드러났는데 이를 종합해본 결과 안에서 밖으로 열어 젖히는 특이한 공법으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던 것이다.
 동쪽벽에는 성벽 중간에 아직도 배수구가 남아있다. 원추형의 배수구는 계단식으로 축조되어 성안의 물이 성벽 중간을 통해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배수시설은 신라성의 한 특징인데 그 원형을 바로 삼년산성에서 찾을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전초기지 역할을 한 이 산성은 숱한 역사의 애환을 가지고 있다. 관산성 싸움에서 순찰나온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복병에 잡혀 삼년산성에서 비장(裨將) 고간도도(高干都刀)에 의해 역사의 이슬로 사라졌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후 당(唐)의 고종은 사신 왕문도(王文度)를 보내 황제의 조서(詔西)를 전달케했는데 무열왕은 서라벌이 아닌, 삼년산성에서 그 전달식을 치렀으니 우리고장에서 있은 첫번째 국제회의에 해당한다.
 철옹성 삼년산성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함인지 비 바람에 씻겨 자꾸 무너지자 관계당국은 이의 보수에 나섰는데 중점적으로 복원이 된 서쪽벽의 복원작업이 문제가 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한때 세계문화유산 후보로도 추천이 검토되었던 삼년산성은 이러한 복원문제 때문에 후보에서 탈락하는 비운을 겪은 바 있다. 동쪽, 북쪽 벽은 허물어진채 그대로 있으니 이곳을 복원하려면 원형대로 하던지, 자신이 없으면 그냥 두는 편이 낫다.
 이번에 충북대중원문화연구소에서 성안에 있는 연못 아미지(蛾眉池)를 발굴하였다. 그 결과 연못을 둘러싼 석축 담장 유구와 더불어 수많은 기와류와 토기편, 고배, 접시, 구리거울, 방추차, 숫돌, 쇠도끼 등 야사에 묻힌 삶의 흔적들이 드러났다.
 뻘층 아래에서는 목재, 열매 등이 계속 출토되는 등 아직도 연못 바닥층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 연못을 완전히 발굴하면 또다른 삼년산성의 비밀이 풀릴 것으로 기대된다.
 복원은 발굴을 실시한후 추진하는게 순서다. 산성의 안팎, 특히나 일대에 밀집된 고분군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도 실시했으면 한다. 산성 일대의 고분군은 상당수가 도굴된 상태다. 도굴꾼의 표적으로 부터 고분을 보호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삼년산성의 정비작업은 아직도 멀었다. 정비가 완료되면 산성의 안팎에서 역사체험 축제를 갖는 방안도 검토해 봤으면 한다. 보은이 갖고 있는 역사 자본중 삼년산성의 비중은 자못 크다. 역사문화는 애착을 갖고 가꾸는 데에서 더 큰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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