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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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18.08.1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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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산나물비빔밥 식당 주변이 왁자하다. 전국에서 몰려온 친구들의 눈빛이 빛난다. 파뿌리 같은 희끗희끗한 머릿결에 이랑처럼 굵게 파인 주름살이 묻어난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얼굴들을 마주한다. 정겨운 표정에 동심이 가득하다. 물바람 소리에 새긴 지나온 세월을 묻느라 잔칫날 분위기다. 실로 50년 만의 해후다.

올해로 초등학교 졸업 50주년이 되는 해다. 햇수가 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1박 2일 일정으로 속리산과 청남대를 돌아보는 여행길에 오른다.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친구들의 안부를 물으며 마련한 소풍이다. 행사를 준비하며 친구들이 호응할까 은근히 걱정하였는데 기우였지 싶다. 더 늙기 전에 만나야 한다는 마음이 통한 것인가. 의외로 많은 친구가 참여 의사를 보내왔다.

세조길로 향하는 오리 숲은 인파로 북적인다. 길섶에 늘어선 노송이 사열받는 병사들처럼 일행을 반긴다. 신산의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여전히 쩡쩡하다. 거북등처럼 두툼한 비늘이 용트림하는 나무껍질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낀다. 장년을 넘어 노년의 길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고목이 저리도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데 나 자신은 날이 갈수록 쇠잔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숲의 정령은 지친 영혼을 인도해주는 듯하다.

속리산 숲은 우리의 메마른 감성을 일깨운다. 숲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상념에 잠긴다. 반세기만의 만남은 세월 저편에 가라앉은 추억을 떠올린다. 망각의 강을 건너 유년의 언덕에 오른다. 산자락 아래 천년 고찰 법주사 고즈넉한 풍경이 지친 나그네를 맞는다. 초입부터 경내에 이르는 길이 온통 진초록이다. 수백 년이 넘음직한 우람한 노송들이 눈길을 압도한다. 절보다 주변 풍광에 눈이 쏠리는 건 계절 탓일까, 나이 탓일까. 법주사 경내를 돌아보는 친구들의 발길이 느슨하다. 더위 탓도 있지만, 그만큼 사물을 바라보는 감성이 사그라진 이유이리라. 여행은 본래의 나를 일깨우고 무뎌진 마음을 벼리는 일이건만 감성이 시든다는 건 슬픈 일이다.

문득, 예전 초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이 떠오른다. 떠나기 전날 그 떨리는 설렘을 어찌 표현하랴.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60년대는 대부분 기차가 이동 수단이다. 서울역에 내려 바라본 시내 풍경은 한마디로 경이로움 그 자체다.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는 촌놈의 말문을 막는다. 모든 게 생소하고 신기하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서울은 만화경을 보는 듯하다. 그때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온 수행여행의 잔상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남아있다.

빛바랜 흑백 사진을 바라본다. 푸른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을 펼치며 추억을 더듬는다. 가난이 따개비처럼 들러붙던 궁핍의 시대. 비록 가진 건 부족하지만 마음은 늘 부자였던 시절이 아닌가. 등하굣길이 멀어도 힘든 줄 모르고, 자연을 마당삼아 망아지처럼 뛰놀던 유년시절이 너무 그립다. 까까머리 친구들의 모습이 세조길을 걷는 발소리에 되살아난다.

조붓한 산길을 오르는 친구들 발길이 모데라토(Moderato)에서 안단테(Andante)로 바뀐다. 느린 발걸음이 초로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듦이다. 하지만,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모습이 그리 정겨울 수가 없다. 산행의 정점은 세심정(洗心亭)이다. 동동주 몇 잔에 불콰해진 얼굴로 그간 못다 한 사연을 귀에 담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첫 만남에 데면데면하던 친구들도 금세 동심으로 돌아가 계곡물이 출렁이도록 흥겨운 모양이다.

세월의 긴 강을 건너 반백 년 만에 만남이다. 삶의 희로애락을 간직한 친구들 모습을 본다.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온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네들에 대화 속에 진작 만나지 못한 회한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듯하다. 온화한 인품으로 동창회를 이끄는 J 회장, 모든 친구들에게 귀한 건강식품을 아낌없이 선물한 K, 여전히 개구쟁이 악동 모습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K, 고향을 지키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B, 노랫가락으로 봉사하며 인생 2막을 멋지게 사는 K, 철저한 자기관리로 눈부신 미모를 자랑하는 L, 새침데기 L과 J, 비록 동행은 못했지만 마음의 정을 듬뿍 전해준 친구들. 모두가 정답고 그리운 벗이다. 모처럼 이루어진 힘겨운 산행이었지만, 친구들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하다. 오늘의 만남을 갈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본다. 나뭇결만큼이나 숱한 질곡의 세월을 헤치고 살아온 친구들이 자랑스럽다. 우리는 같은 세대에 태어나 서로의 아픔과 슬픔, 고통과 고난, 기쁨과 즐거움을 껴안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삶의 칠부 능선을 걸으며 남긴 소풍길은 새삼 친구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비록 육신은 늙어가도 마음만은 쪽빛 바다에 차오르는 아침 햇살처럼, 해풍에 피어난 싱그러운 장다리꽃처럼 멋진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네 삶은 죽음이 잠시 빌려준 부채에 지나지 않는다. 부디 남은 생애 동안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붉게 타오르는 태양처럼 빛나길 소망한다.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 미당의 시구절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랜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친구여,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안녕.



약력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청주문화원 이사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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