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의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 역사문화환경, 생태환경은 인간과 손을 잡을때 제값을 발휘한다. 그러나 인간이 환경의 주체라고 해서 주변환경을 마구 다루고, 인간생활의 편익이라는 지극히 근시안적이고 단세포적인 목적에서만 해석할때 자연은 더 이상 손잡기를 거부한다.
 특히나 동양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환경의 주체라기보다 환경의 일부로 해석된다. 집을 지어도 자연을 집안에 끌어들이고, 때로는 자연의 품에 안기는 환경친화적인 방법을 써왔다.
 이러한 관념은 산업화, 디지털화 세상으로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무참히 깨어지고 있다. 오만하게도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전환케 되었다. 그 결과 종전보다 편리해지긴 했어도 산소부족, 수질악화 등 하혈을 하는 자연의 복수로 인간의 숨통은 옥죄어 들고 있으니 이 모든게 업보다.
 시멘트 문화로 망가진 환경복원은 인간의 그 알량한 휴매니즘이라기보다 실상은 인간이 살기 위한 자구책이요, 몸부림이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진다해도 환경이 망가지면 말짱 소용없는 일이다.
 청주의 젖줄, 무심천이 이러한 자각증상아래 오랜 신음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시커먼 탁류가 서문다리밑을 흐르던 60~70년대와는 확실히 다르다. 한때 자취를 감추었던 피라미, 꽃붕어가 다시 뛰놀고 물새떼가 훠이 훠이 물가로 날아든다.
 무심천을 원래 모습대로 가꾸려면 아직도 할 일이 많다. 백로떼 옆을 마구 스치며 달리는 하상도로의 차량 행렬을 멈추게 하고 생활하수를 더 걸러야 하며 찰랑 찰랑 물이 넘치도록 수량을 늘려야 한다.
 요즘 논란이 일고 있는 수중보도 그 하나의 방편이나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걱정되는 일면도 있다. 관계당국과 환경단체가 맞서고 관련학계의 의견도 서로 다르니 평범한 시민으로서는 어느 것이 맞는 얘긴지 아리송할 뿐이다.
 옛날의 수중보는 모두 물이 보위로 넘쳐 흘렀다. 상류로부터 모래가 쌓이기 때문에 바닥을 긁어내지 않으면 바로 하천 바닥이 높아졌다. 요즘은 새로운 공법의 하단 배출식 수중보가 등장,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고 있다.
 이 방식에 대한 검증작업은 필히 선행돼야 할 것이다. 무심천과 하단 배출식의 수중보가 궁합이 잘 맞는지, 이로인해 무심천의 수질이 개선되는지, 아니면 쓸데없는 시멘트 구조물로 전락하는지 예견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파리의 센강은 무심천보다 조금 크다. 파리 당국은 그 탁류에 대해 애정을 갖고 오랜시간을 공들여 가꿔왔다. 아폴리네르의 싯귀대로 미라보 다리 아래로 사랑이 흐르고 유람선이 파리 시가를 한바퀴 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몸살을 앓던 런던의 테임즈 강도 숭어떼가 되돌아 오는데 수십년이 걸렸다. 이제는 런던시민의 휴식처로 다시 사랑을 받고 있다.
 영양실조에 걸린 어머니의 젖꼭지를 빨아 대다가 제풀에 겨워 잠든 아기의 모습이 어제의 무심천이다.문명의 재채기에서 깨어나 다시금 청주시민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무심천이 더욱 실팍해지려면 모체를 고문한 시멘트 문화를 걷우어 내고 자연형 하천으로 만드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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