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언론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안들이 모두 그렇다.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파병과 그 반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 미국과의 관계설정, 새만금 개발과 반대, 원전폐기물처리시설 설치와 그 반대 등이 그렇고 크게는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의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어 보인다. 선 성장과 후 분배라는 경제논리의 해묵은 싸움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쪽을 맞다 또는 틀리다라고 하기
엔 자신이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세월이 살아온 세월보다 짧아 보이는 처지에서는 아무래도 복합사고(複合思考)를 하게 되고, 따라서 단순하게 릫예릮와 릫아니오릮를 말하기가 힘들어진다.
일천(日淺)하기 짝이 없지만 그간의 삶에서 축적된 경험이 릫그렇다 또는 아니다릮에 대한 말문을 더욱 막아버린다. 굳이 말하자면 너무도 흔히 릫예릮와 릫아니오릮 그 사이에서 우물쭈물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죽도 밥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때가 많다.
그래도 나름대로 깃발처럼 들고 있는 잣대가 하나 있다. 이른바 릫가치중립적릮 분석과 판단이다. 여기서 가치중립이란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어떤 사실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 때로는 정반대의 입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동전 하나가 양면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흔히 동전은 오직 한 면만 있다고
우기는 어리석음에서 가치중립적 분석과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로는 대립된 두 주장이나 현실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장점과 단점을 가능한 한 공정하게 분석하는 일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장점이나 단점의 일부를 과소평가하거나 침소봉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서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대립이라는 이유로 아예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장점이나 단점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는 지혜를 갖추자는 것이다.
하나를 이유로 다른 하나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상생(相生)의 원칙에 어긋난다. / 천주교 청주교구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