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이영희 수필가

사진. / 이영희 제공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의 시원함이 좋다.

새벽부터 30도를 웃도는 가마솥더위라 꾀부리는 마음이 더운데 쉬자고 핑곗거리를 찾지만, 녹음이 우거진 청년 같은 여름 산이 손짓하는 듯하여 용감하게 나섰다. 짧은 거리를 걸어도 땀이 비 오듯 하지만 찬물로 샤워를 하고 독서를 하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더군다나 남편은 마님을 위해 그늘이 지는 등산로를 발견했다고 하니.

청년도 등산을 하다가 119에 실려 갔다고 친구는 조심하라고 전화까지 했지만 땀이 체온을 내려 주고 체력을 강화해 주니 이보다 좋은 피서가 어디 있으랴.

인생을 정비공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 신조어를 접했을 때는 웬 정비공, 이 더위에 얼마나 고생을 할까 했지만 음미할수록 매력적인 말이다. '인생은 정답이 없고 비밀도 없으며 공짜가 없다.'라는 첫 글자를 딴 말이라니, 인생을 함축적으로 요약한 촌철살인 언어이지 싶다. 지하에 계신 세종대왕께서 아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배울 수 있게 했더니, 국적불명의 신조어나 들먹인다고 진노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문명이 초 광속으로 발전하는데 한글 창제하신지 500여 년이 지났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문장밖에 없고,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게 없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감히 아뢰고 싶다.

물론 사지선다형의 답은 4개 중 하나이지만, 어쩌면 삶 자체가 답이 없는 시험지이고 지뢰밭이라고 하면 엄살이라 할지. 삶이라는 시험지를 앞에 두고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는데 때로는 인내가 답이지만 때론 용기가 답이 되기도 한다. 삶은 장점이 단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장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심지어는 옳고 그름이 뒤 바뀔 수도 있다.

아침 등산만 해도 그렇다. 무더위에 무리하지 말자고 그냥 포기했으면, 땀 흘린 뒤의 이 상쾌함과 무더위쯤이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등산으로 탈진해서 병원에 실려 간 사람은 괜한 짓을 했다고 후회하겠지만, 등산을 하지 않았으면 이 맛을 몰랐을 것이니 대가를 치르지 않는 공짜는 없다는 것을 다시 체감한다. 인어 공주가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얻었다는 동화는 좀 심한가.

지구촌 70억이 넘는 사람들의 얼굴이 다르듯 인간의 성향도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경우의 수도 다 다를 수 있다. 제 눈에 안경 이란 말같이 우리는 자기 눈에 맞는 도수의 안경으로 바라본다.

요즈음 흔히 쓰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내로남불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단면을 시사하는 신조어이다. 아무리 평판 좋고 훌륭한 사람도 보는 각도나 타이밍, 이해관계에 따라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하다. 애인이 있는 것 같다는 소리에 골키퍼가 있다고 공이 안 들어 가냐고 하니까 씹다만 껌을 누가 씹느냐고 하던 이도 있었다. 잘 웃고 상냥하면 가볍게 보인다 하고, 점잖고 말이 없으면 쓸데없이 뻣뻣하고 무게 잡는다고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늘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나사 빠진듯하다고 하고, 세상 걱정 다 하듯 꼼꼼한 사람은 편벽 지고 좀스럽다고 한다. 이렇게 평판이 경우에 따라 상반되게 뒤바뀌는 게 부지기수니 정답이 없다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래서 관 뚜껑을 닫은 뒤에나 제대로의 평가가 나온다는 말을 하는지 모른다.

이렇게 나의 결점을 못 보면서 남의 결점은 잘도 보는 것을 인간 탄생의 원죄에서 찾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프로메테우스가 처음 진흙을 이겨 인간을 빚으면서 하나의 보따리에는 남의 결점을 가득 채워서 앞에다 달아 놓고, 자신의 결점을 가득 채운 보따리는 등 뒤에 달아 놓아 내 잘못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을 정답이 없다고 그 옛날 원죄 탓만 하며 삶을 유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출구가 없으면 벽이라도 뚫어야 하는 게 삶이다.

인생의 정답은 없지만 지혜롭고 유연하게 모범 답안에 다가가고, 대가를 치르지 않는 공짜는 없다는 신조어 정비공을 다시 음미해보며 배우는 것도 피서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약력
▶1998년 '한맥문학' 신인상
▶충북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청풍문학회 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칡꽃 향기'
▶충청북도교육청 방과후학교 지원단장 역임
▶현재 청주시 1인 1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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