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1세대] 충주 전창배씨 인터뷰
지난 6월 이산가족상봉 신청 '생사 불확실 이유' 미선정
어머니·동생들과 떨어져 중1때부터 아버지와 남한 생활
40여명 넘었던 개성 모임 회원 현재 8명밖에 안남아

전창배씨는 "분단국가의 가장 큰 피해자인 이산가족 1세대들은 더이상 시간이 없다"며 "가족들의 생사만이라도 제대로 확인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이완종
전창배씨는 "분단국가의 가장 큰 피해자인 이산가족 1세대들은 더이상 시간이 없다"며 "가족들의 생사만이라도 제대로 확인하고 싶다"고 피력했다. /이완종

[중부매일 이완종 기자] "북에 있는 동생들에게 편지 한통이라도 전달하고 싶습니다. 안되면 생사라도 확인 할 수 없을까요?"

전창배(82·충주 지현동)씨는 최근 이뤄진 제 21차 남북이산가족상봉 소식에 아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 1세대로 이번 이산가족 상봉에 많은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전 씨는 지난 6월, 북쪽에 남겨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대한적십자사에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했다. 그러나 '생사여부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쉽게 이번 이산가족 상복 가족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0년도 들어 남북관계가 점차 완화되며 '이산가족상봉'이 시작됐습니다. 기회가 될때마다 북쪽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했는데 아쉽게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았습니다. 이미 노쇠해진 몸은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 이산가족상봉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신청했는데 결과는 좋지 못했죠."

황해북도 개성시 동현동이 고향인 전씨는 6.25한국전쟁 당시 아버지 전광서씨의 손을 잡고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전씨는 갑작스런 중공군의 참전에 국군이 후퇴(1·4후퇴)하며 어머니와 동생 등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다. 당시 어머니와 젖먹이었던 동생 전영배씨, 그리고 3살 터울의 동생 전홍배씨는 개성에 남겨졌다. 아버지를 따라 잠시 외출 정도로 생각했던 전씨는 그 뒤로 어머니와 동생들이 남아있는 고향땅을 밟을 수 없었다.

"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잠시 외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피란길이 됐습니다. 이미 중공군이 물밀듯 내려와 개성을 점령한 상태였고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건너와 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사진 한장을 가져오질 못했습니다."

전쟁 직후 남한에서의 삶은 여유롭지 않았다. 당장 생계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아버지를 따라 전국 팔도 안가 본 곳이 없어요. 아버지께서 개성에 계실때 공직자로 계셨는데 남쪽에 와서는 양복점을 운영하셨습니다. 하지만 넉넉치 못한 삶에 북에 있는 가족 걱정은 항상 뒷전이었죠. 결국 아버지께서는 북쪽의 가족들의 소식 한통 듣지 못하고 1982년 돌아가셨습니다."

때문에 전창배씨는 마지막으로 더 늦기전에 동생들의 생사만이라도 제대로 확인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 6만여명이 넘는 이산가족들의 상봉이 여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1세대 이산가족 당사자들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총 40여명이 넘었던 고향이 개성인 모임회원은 현재는 8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봄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한편 북측 이산가족 83명이 남쪽 가족들과 만나는 제21차 남북이산가족 2차 상봉은 24~26일 금강산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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