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보디랭귀지가 꼬리뼈를 따르르 떨게하는 김부자의 '달타령'이다.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으로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던 낭만은 증발하였지반 동양권에서 달에 대한 애착은 여전하다.
 중국의 시선 이태백은 달을 너무 사랑하여 호수에 빠진 달을 건지려다 익사하였다. 그는 달빛아래서 혼자 술마시기를 좋아했고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는 시까지 남겼다.
 어느 시인이 달빛 아래에서 술을 마셨다. 달이 몇 개냐고 상대방이 묻자 모두 다섯 개라고 대답하였다. 달은 하나인데 어찌 다섯 개 씩이나 될까. '첫번째 달은 하늘의 달이요 두 세번째 달은 술잔과 호수에 비친 달이며 네번째 달은 그대 눈동자에 비친 달이고 다섯번째 달은 마음의 달이다'이라는 해석이었다.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대목이다. 어느 죄인이 있었는데 형리가 죄인을 놀리려고 퀴즈를 냈다. '만약 당신이 하늘의 달을 따오면 죄를 면케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하늘의 달을 무슨 수로 딸까. 그러나 죄인은 바가지에 물을 담아 왔다. 그 물을 들여다 보니 분명히 달이 떠 있었다. 형리는 약속대로 죄인을 풀어 주었다.
 한가위 둥근 달이 둥실 떠오르고 있다. 달은 가난한 자에게도 부자에게도 공평하게 떠오른다. 부촌에도 뜨고 달동네에도 뜬다. 물리적인 달이야 모두에게 똑같이 보이겠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은 달리 보이기 마련이다.
 달덩이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달이 새 희망을 가져다 준다고 믿을 것이며 실직자가 보는 달은 웬지 처량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차비가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하는 노숙자가 보는 달은 어떤 달일까. 자신의 구겨진 모습을 비추는 밝은 달이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불경기 속의 달밤은 한가위의 낭만조차 앗아갔다. 백결선생이라도 계셨으면 초빙하여 방아타령이라도 연주하련만 우리들 마음 속에서 그같은 여유와 낭만이 사라졌으니 탄금(彈琴)을 한다해도 아무런 감흥이 솟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 해도 마음의 달은 잃지 말아야 한다. 이마저 마음 한구석에서 달아나 버린다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것인가.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을 수놓던 핸드 인 핸드(Hand in hand)는 한가위 보름달 아래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놀던 강강수월래나 다를 바 없다.
 모든 사람들이 이날 만큼은 조건, 신분을 초월하여 손을 맞잡고 따뜻한 정을 나누었는데 각박한 현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다.
 우리의 생활문화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미학 속에서 태동하였다. 초가지붕이 둥글고 님의 얼굴이 둥글다. 여러가지 열매도 둥글고 밥그릇, 접시도 둥글며 축구공이나 CD도 둥근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런 곡선의 문화 속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터에 사람의 마음도 둥글었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IMF 바람이후 사람들의 둥근 마음이 점차 각이 지고 있다. 사람마다 대립각을 세우면 싸움이 잦기 마련이다. 아무리 생존경쟁이 심화되어도 마음만큼은 둥근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회를 풍요롭게하는 원융(圓融)의 철학이다. 원융이란 말 뜻 그대로 '둥글게 융합한다'는 뜻이다.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각이 진 마음을 깎아 둥글게 만드는 '마음의 몰딩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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