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기사와 직접 관련 없습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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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아침뜨락 김순덕] 함께 생활하던 큰아들이 타 지역으로 발령이 나면서 짐을 챙겨나갔다. 식사부터 빨래까지 모든 것이 못 미더운 엄마와는 달리 새로운 환경에 들뜬 아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새로 얻은 원룸을 우리 집이라고 불렀다. 묘한 배신감과 함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을 실감하며 아들 방을 청소하고 책상을 정리했다. 이제는 버려도 될 것과 남기고 싶은 것을 구분하다 보니 제법 시간이 걸렸다.

무거운 뱃속을 드러낸 책상 서랍 속에는 정리할 때마다 살아남은 막내의 일기장이 있었다.초등학교 때 삐뚤빼뚤 휘갈겨 쓴 막내아들의 글씨가 정겨워 그리움의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일기장 첫 페이지에는 새 공책에 대한 예의로 정성을 기울여 쓴 깨끗한 글씨가 '오늘 나는'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일기이고 본인이 쓰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나는'과 '오늘'로 시작되는 문장이 아이답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간혹 귀찮다는 듯 쓴 일기도 있었고 단순하게 먹고 잠을 잔 내용이 공책 칸을 채우고도 있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매일 반복되는 생활에서 숙제처럼 일기를 쓴다는 것은 곤혹이었을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썼든 간에 일기는 아이를 성장시켜 주었다. 저학년 때 쓴 일기는 사실 그대로의 행동을 글로 옮겼다면 고학년 때의 일기는 자기의 생각을 덧붙이고 반성과 생각을 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6학년 때의 일기 속에는 그 날의 핫뉴스를 일기장 말미에 적었다는 것도 기특했다. 일기장 속에서는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아이의 성장하는 모습을 다시 엿볼 수도 있었다. 언제였던가. 하얀 봉투에 만원 권 다섯 장과 편지를 생일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있는 그해가 아들이 몇 학년 때였는지 궁금했는데 일기장 속에서 이번에 찾을 수 있었다. '다가오는 생신'이란 제목으로 쓴 일기 속에는 '엄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는 글 맺음이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용돈에 얼마나 아까웠을까 싶은 마음에 더욱더 감동의 자산이 된 생일이었다. 고교 때 작성한 노트 한 권도 눈길을 끌었다. 관찰일지라는 타이틀의 표지를 보고 한때 기록한 과제물인 것 같아서 버리려다가 펼쳐보았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아이가 훌쩍 성장한 만큼 정갈한 글씨로 깨끗하게 기록된 내용은 특이하게도 같은 반 친구들의 특성과 성격 등을 아들의 눈으로 바라본 것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한 명 한 명의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많이 바라본 아들의 마음이 고맙고 잘 키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 쓴 나의 일기장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아궁이 앞에 앉아 한 장 한 장 찢어가며 불쏘시개로 태워버린 기억이 있다. 사춘기 때는 자물통이 달린 예쁜 표지의 일기장을 구입하여 복잡 미묘하게 올라오는 새로운 감정들을 기록하며 혹시나 누가 훔쳐볼까 하는 마음에 열쇠를 꽁꽁 숨겨두기도 했었다.

나의 일기장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드는 시간. 지나온 세월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기억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멋진 청년으로 자란 막내아들의 모습에서 가끔은 내 품을 파고들던 개구쟁이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지금처럼 아들의 일기장에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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