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의 차 이야기] 28. 대만의 차 여행

어디쯤일까. 작은 유리문 밖을 내다보니 솜사탕 같은 구름떼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구름도 향기가 있을까.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 뭉글뭉글한 구름 한 조각 풀어 마시고 싶다. 흰 구름은 싱그럽고 달큼한 '문산포종'의 맛, 회색구름은 은근하고 맛이 깊은 '동방미인', 파란 향기가 스멀대는 새털구름은 대우령의 맛?

3박 4일간의 차 여정에 관광까지 욕심을 내다보니 성급함이 앞선다. 입국장 밖에는 예정대로 박 선생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서툰 중국어 실력으로 중요한 일을 볼 수가 없기에 대만에 올 때 함께하는 한국인이다. 그날따라 비행기가 30분이나 공중부양을 하고 늦게 착륙하던 차 그녀의 밝은 웃음에는 꼼꼼한 남편의 걱정이 한 웅 큼 배어 나왔다. 펄펄 끓어오르는 공항의 지열 위로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타이베이 시내는 아담한 차 상가들이 드문드문 나열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경동시장 같은 분위기랄까. 좋은 차를 구한다고 예전처럼 일정 내내 차산지의 탐험가가 될 필요는 없었다. 찾아간 상가는 차밭의 경영과 함께 3대째 이어온 차 전문상가였다. 늙수그레한 주인은 영어가 된다는 말끔한 청년에게 나를 소개했다. 차상의 대를 이어갈 차분한 분위기의 손자였다. 젊음이 좋은 걸까. 우려 주는 차마다 신선함이 더 했다. 매끄럽고 산뜻한 농축액은 목구멍을 타고 빠르게 마른 심장을 파고들었다.

우선 대만의 남투현(南投縣)에 위치하고 있는 아리산(阿里山), 삼림계(杉林溪), 리산(利山), 복수산(福壽山), 대우령(大禹嶺)을 순서대로 시음했다. 해발 1000~2600m 고산지의 차만큼이나 감칠맛과 청순한 향이 뛰어났다. 한 모금 한 모금을 혀 안으로 굴리며 차의 속살을 베껴내듯 천천히 아주 깊게 음미했다. 농부는 일 년 지 수확을 잘해야 겨울을 편안하게 나겠지만 내겐 이순간이 그렇다. 나를 기다리는 다우들에게 착한 가격에 충실한 맛을 제공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내 혀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근에 200에서 300만원 하는 품평차를 마실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림의 떡 아닌가.

대만을 대표하는 동방미인을 마셨다. 꽃과 과일 향기가 난무하다. 과연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동방의 미인이라고 할 만 큼 오묘한 맛이 농후하다. 벌레가 찻잎을 갉아먹을 때 벌레의 침과 찻잎이 어우러져 절묘한 향기와 맛을 만들어낸다. 상생의 이치가 천혜의 향기를 뿜어 올린다. 그렇다면 차를 구입할 때 문제인 농약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먹거리가 불안한 세상에 가장 안전한 기호식품이 아니던가.

정지연 원장
정지연 원장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햇살이 희미해진 도시에 황혼이 내려앉는다. 온 촉감을 곤두세운 나의 신경도, 마시고 뱉어 내는 일에 진력난 나의 혀도 저녁노을같이 붉다. 가만히 앉아서 대만의 차산지를 맛과 향으로 활보했지만 결정은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한번 마셔보고 선택하지 않는 것이 노하우로 얻어진 나의 신조다. 차 사업을 대성시킬 사업가답게 나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젊은이의 표정이 해맑다.

호텔은 답답할 정도로 좁았다. 가방 내던지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천정도 벽도 커튼도 모두 어색하고 낯설다. 티브이는 알 수 없는 말로 날 희롱했다. 이 불편한 고독이 행복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알아주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나비되고 벌되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꿈을 꾼다. 맛 찾아 향기 찾아 떠나는 나의 밀행은 멈춰지지 않는다. /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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