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련을 거치면 기교가 생김

바람이 분다. 시원하다. 그런데 아직도 연구실 밖에는 매미가 울어댄다. 여름이 지나감이 그리 서글픈 것일까?

한창 더웠던 7월이었다. 늘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갑가기 전화를 걸어 "배 교수! 내일 내가 개인전을 하는데 와서 축사를 해주면 어때? 미안해 갑자기!" 내가 물었다. "어떤 개인전이야? 알고나 가자!" 친구는 "그냥 와! 와보면 알아!" 그러곤 전화를 뚝하고 끊어 버린다. 통하를 마치고 한참 생각했다. 무슨 개인전일까? 붓글씨? 평소 활달한 친구는 진득하게 앉아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붓글씨는 아닐 것이다. 사진전일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니 그럴 가능성은 조금 있겠다. 허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친구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은 적이 없으니 고개가 갸우뚱!

친구가 카독으로 보내준 장소로 갔다. 꽤 넓은 마당에 장승이 20여개가 죽 늘어서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제법 솜씨를 부린 장승들이 내 주위를 삥 둘러치고 환영의 목례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 구석에 밀짚모자를 쓰고, 목에 수건을 두른 촌부가 내게 달려왔다. 가만히 보니 친구가 맞았다. 이전에 술 잘 마시고, 주위를 흥겹게 만드는 외향적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수수한 촌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친구는 목소릴 높여 "어서와! 덥지?" 준비해둔 냉커피 한 잔을 건넨다.

함께 차를 마시며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 있는 자식들은 모두 성장했으니 신경 쓸 일이 없고, 아내는 교회에 열심인지라 자신은 시골에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실 요량으로 귀향을 결정했단다. 고향으로 돌아와 한동안 책도 읽고, 산책도 하고, 이웃들과 막걸리 나눠 마시고 나름 즐겁고 유익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책은 잘 맞지 않고, 산책만으로는 활동량이 적었고, 막걸리보다는 소주가 입맛에 맞는 성격인지라 답답함을 면할 길 없었다는 것이 친구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마침 동네 뒷산에 소나무가 병이 들어 모두 벌목을 해야 되었단다. 땔감소나 쓰려고 몇 개를 집에 가져다 놓고 도끼질을 하려는데 도끼질이 잘 안되더란다. 그래서 한참 방치했다가 갑자기 '이왕 땔나무니 장난이나 쳐보자!' 그렇게 해서 장승조각이 시작되었단다.

처음에는 엉망 그 자체였단다. 장승을 어떻게 조작하는 것조차 몰랐고, 공구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헛심만 쓰고 고생만 했단다. 하여 장승 조각 전문가를 찾아가 체계적으로 배우고 익혀 3년에 걸쳐 약 70여개의 장승을 조각했단다. 마을 입구에, 서울 집에, 또는 장승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물도 하고. 재미있더란다. 그래서 계속 장승을 깎고 또 깎아 오늘 그간 장승 조각을 통해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 조촐한 막걸리 파티를 열기로 결정했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나를 불렀단다.

즐거웠다. 나도 언젠가는 퇴직을 할 것이니 친구의 모습은 미래 나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중국 속담이 하나 떠올랐다.

배득렬 교수
배득렬 교수

宋代(송대) 陳堯次(진요차)는 활을 잘 쏘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한번은 그가 굉장히 가는 나뭇가지를 쏴서 부러뜨리고는 길을 지나가던 늙은 기름 장사에게 뽐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노인이 뜻밖에도 "이는 그저 손이 숙련된 것일 뿐이야."라고 말하였다. 그는 말을 하면서 어깨에 멘 기름통에서 호로병을 하나 꺼내서 동전 한 닢을 입구에 올려놓고는 주걱으로 기름 한 바가지를 높이 들어서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기름이 마치 실처럼 동전 구멍을 지나 호리병으로 들어갔다. 주걱의 기름이 따 떨어졌으나 동전에 기름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노인이 "무슨 일을 하든 숙련되면 기교가 생기기 마련이다."라고 말하였다.

기름장수의 "무슨 일을 하든 숙련되면 기교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 한마디가 친구의 그간 모든 땀 흘린 수고로움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상처뿐인 친구의 손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인내를 발휘하여 긴 시간 노력하면 언젠가 그 보답을 받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고 돌아왔다. 나도 예전에 그만 둔 붓과 벼루를 꺼내볼까? 기분 좋은 상상만으로 행복해졌다. / 충북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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