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쳐디자이너·에세이스트

기사와 직접 관련 없습니다.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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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문화칼럼 변광섭] 어머니는 달 뜬 새벽에 일어나 부지깽이를 들고 군불을 지폈다. 가마솥의 밥을 짓고 아욱국을 끓였다. 토종된장을 풀어 끓인 아욱국은 가을하늘처럼 푸르고 깊은 맛이 있었다. 나는 코끝을 간질이는 연기와 부엌의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놀라 아침잠에서 일어나 이불을 갰다. 소년의 하루는 이처럼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로 시작했다.

집 앞에는 드넓은 공터가 있었다. 이름하여 탕마당이다. 이곳에는 두레박으로 약수를 길어 올려 마실 수 있는 곳이 있고, 돌계단을 타고 내려가 졸졸졸 흐르는 물을 받는 곳도 있었다. 사람들은 신령스런 물이라며 줄을 섰다. 어머니는 탕마당을 지날 때마다 한 손에 호미를, 또 다른 손에는 물병을 들었다. 탕마당에서 물을 담아 밭으로, 논으로 가는 것이다. 불볕이 이글거릴 때에도, 하얀 눈이 가득할 때에도 당신께서는 팍팍한 이 길을 나섰다.

어머니의 손에는 항상 먼지가 서걱거렸다. 얼굴에는 흐르는 땀이 멈출 줄 몰랐다. 온 종일 호미를 들고 밭에서 모종을 내고 풀을 뽑았다. 치맛자락 날리며 논두렁으로 달려가 콩을 심었다. 하천가에 자투리땅만 보여도 곡식을 심었다. 여름과 가을에는 고추 담배 뽕잎 등을 따고 말리느라 해 지는 줄 몰랐다. 탕마당에서 뛰어놀던 소년은 저 멀리 신작로에 치맛자락 펄럭이면 쏜살같이 달려갔다. 치맛자락이 나풀거릴 때마다 당신의 몸에서 흙냄새가 났다.

저녁상을 차리면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여름에는 마당에 평상을 놓고 모깃불 지펴가며 밥을 먹었다. 옥수수와 감자를 찌면 별들이 쏟아지고 달빛은 하얀 문풍지를 가득 채웠다.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담벼락에 심은 봉숭아 채송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깨를 까불기 시작했다. 깊은 밤 호롱불 아래에서 삯바느질을 했고 다듬이 소리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겨울이면 안방의 화롯불에 불이 꺼지는 날이 없었다. 타닥타닥 불씨를 뒤집으면 감자와 고구마가 구순하게 익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뚝배기에는 청국장이 보글보글 끓었다. 장독대에는 꽁꽁 얼은 고욤과 홍시가 가득했으니 겨울철 간식거리였다. 사계절 술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동네 어른들이 마실 와서 술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어머니가 누워계신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 주무시고 언제 일어나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학교 때였다. 학교 회비를 내야하고 노트도 사야했다. 버스표도 사아만 통학을 할 수 있는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어머니는 부엌 찬장에 있던 동전을 내 손에 쥐어주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어린 소년은 짜증을 냈다. 학교도 가기 싫었다. 뒷산에서 하루 종일 다람쥐처럼 놀았다. 그날 어머니는 사과를 한 광주리 가득 담아 청주 육거리시장에 가져갔지만 팔지 못한 채 되가져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의 모습이 쓸쓸했다. "아들아, 사과 알이 작다고 사지 않더라. 애미는 못나서 이렇게 살지만 너는 큰 사과, 큰 사람이 되거라." 그날 저녁 밤새도록 울었다.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었고, 어머니에게 대든 못난 놈이기에 울었다. 수많은 별들이 내게로 왔다.

늙은 어머니는 허리가 굽어지고 무릎관절과 당뇨에 혈압까지 성한 곳이 없다. 그런데도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갔다. 고추밭의 잡초를 뽑는데 풀 속에 숨어있던 독사가 당신의 손등을 물었다. 119에 실려 갔고 1주일간 중환자실에서 해독제를 맞았다. 혈액투석을 시작했다. 그 해 추석 전날 저녁, 어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잡순 뒤 마당 한 가운데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에세이스트

어머니는 3년째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다. 불효자식이 오면 눈을 뜨고 맥없이 쳐다본다. 살고자 하는 의지도, 미련도 모두 부려놓은 표정이다. 어머니의 마른 손을 잡았다. 생의 손마디가 주름지니 애달프다. 마음이 허기지고 쓸쓸했다. 소쩍새는 앞산 뒷산에서 우는데, 달도 뜨고 별도 쏟아지는데, 마음은 시들어 지쳤다. 당신의 곱디고운 젊은 날의 풍경은 속절없고 치맛자락에 푸석거리던 신작로도 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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