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 논설실장·대기자

지난 25일 옥천군 옥천읍의 한 아파트에서 생활고 등의 이유로 가장인 남편 A씨가 아내와 자녀를 살해한 사건이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남편 A씨가 운영하던 검도관이 수일 전부터 문을 닫은 채 운영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 됐다./신동빈
지난 25일 옥천군 옥천읍의 한 아파트에서 생활고 등의 이유로 가장인 남편 A씨가 아내와 자녀를 살해한 사건이 지역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남편 A씨가 운영하던 검도관이 수일 전부터 문을 닫은 채 운영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 됐다./신동빈

[중부매일 박상준 칼럼] 그는 오로지 가족과 운동밖에 모르는 검소하고 착실한 40대 무도인(武道人)이었다. 부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꽃 같은 어린 딸 셋을 둔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제자들에겐 실력과 열정을 갖춘 스승이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살인자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가족을 무참히 목 졸라 살해했다. 풍족하지 않지만 단란하고 따뜻한 가정은 순식간에 부셔졌다. 그는 왜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짓밟았을까. 자상한 가장을 한순간 악마로 만든 것은 과도한 '빚' 이다.

옥천 가족 살해사건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병리현상과 문재인 정부 출범이후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한국경제의 깊은 그늘이 복합적으로 함축돼 있다. 올 들어 심화된 소득불평등 현상으로 저소득층이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가계대출도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빚을 감당 못해 계층사다리에서 추락하면서 좌절하는 '위기의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선 자영업자들은 지금 한겨울이다. 최저임금이 껑충 뛰면서 지출은 늘고 수입은 급감하고 있다. 지난해 폐업신고 한 개인·법인 사업자는 90만 9천여 명에 달했다. 올해 문 닫는 사업자는 1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대 최대 규모다. 95% 이상이 식당, 치킨점, 커피숍, 소매점, 학원 등 자영업자다. 간신히 살아남은 자영업자도 출혈경쟁으로 소득이 크게 줄고 있다. 소비심리가 냉각된 상황에서 학원이라고 잘될 리 없다. 인구 3만 명인 옥천읍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던 40대 가장도 불황에 원생들이 줄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가계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최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2분기 도소매·음식·숙박업 대출증가폭이 미국발 외환위기로 한국경제가 휘청 거렸을 때인 2008년 이래 가장 높았다. 원하는 일자리를 못 찾거나 산업구조조정으로 거리에 내몰린 가장들이 빚을 내서 '생계형 창업'을 시작하는 사례가 많았다. 또 소비심리 위축으로 고객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자영업자들이 버티기 식 대출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상당수 자영업자들이 문턱이 높은 은행대신 금리가 비싼 상호금융, 상호저축은행, 새마을금고 등 비은행권을 이용했다. 지난 6월말 기준 자영업자의 대출잔액은 총 600조원을 돌파했다. 만약 부실화된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다.

옥천 40대 가장도 예외 없이 비은행권에서 돈을 조달하고 사채에도 손을 댔다. 그가 소유한 대전 빌라와 아파트는 이미 제2금융권 등으로부터 매매가를 훨씬 웃도는 수억 원의 근저당이 설정돼 있었다. 무엇보다 대학생인 제자 명의로 대출을 받아썼다. 체육관은 경영난에 부딪치고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상황에서 빠듯한 수입에 체육관 관리와 다섯 식구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금리부담이 매월 75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절벽 끝에 서있는 절박함을 느꼈을 것이다.

저소득층의 생활난이 심해지면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비속살인'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가족이 내 것'이라는 그릇된 소유욕과 가장이 없으면 가족들이 불행한 삶을 살 것이라는 착각과 망상은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다. 40대 가장도 "혼자 죽으려고 했지만, 남겨진 가족들이 손가락질 받을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4월에도 증평에 사는 40대 여성이 남편 자살 이후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빚 독촉에 시달리고 사기 혐의로 피소당하면서 "혼자 살기가 너무 힘들다. 딸을 먼저 데려간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가족동반자살'과 '비속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원인은 대체로 한가지로 귀결된다. 감당할 수 없는 '가계 빚'이다. 개인파산신청이라는 제도가 있는데도 '생활고'에 시달려 절망에 빠지면 삶의 의욕도 잃는다. 체육인으로 외길인생을 걸었던 착한 가장도 '빚' 앞에선 이성을 잃었다. 그런데 '위기의 가장'이 많아 졌다는 게 문제다. 자영업자가 감당할 수 없는 빚에 시달린다면 본인의 과실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정부의 정책적 오류도 크다. 정부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추구한다지만 선한의도가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단란한 가정이 파괴되는 '병든 사회'에서 삶의 질 운운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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