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청산 3·1운동 故 박동희 선생 독립유공자 추서
옥천 청산 3·1운동 故 박동희 선생 독립유공자 추서
  • 윤여군 기자
  • 승인 2018.09.0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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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박정만씨가 청산면 31.1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故 박동희 선생의 대통령 표창장을 전수받았다. / 옥천군

[중부매일 윤여군 기자] 청산 3·1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태형의 옥고를 치룬 고(故) 박동희 선생이 후손을 비롯해 청산면 직원과 공무원의 끈질긴 노력 끝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국가보훈처는 지난달 15일 '제73주년 광복절'을 맞아 박 선생을 항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박동희 선생의 독립유공자 추서는 현재 독도경비대장을 맡고 손자 박연호(51)씨가 국가보훈처에 3번째 재심의를 신청한 끝에 이뤄졌다. 

박동희 선생은 1919년 3월3일 청산장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 몇일 전부터 동료 박재호, 안병하, 김복만 지사 등과 마을에서 회합을 갖고 태극기를 몰래 만들어 3일동안 청산면 만리방천(萬里防川)에서 3.1만세운동을 벌이며 독립을 외쳤다.

3월 6일 당시 청산만세운동을 진압한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만세를 부르던 청산 주민 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청산면 지전리 장터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같은 강력한 헌병대의 진압으로 시위 군중들은 일시적으로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동희 지사는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대에 대항하다 결국 체포되어 공주 교도소에 수감됐다.

교도소에 수감 중에 일본 경찰의 잔인한 고문과 태형 60대를 맞고 풀려났으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5개월 후 23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해 독립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했다.

이후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추서를 신청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서받지 못했다.

당시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1919년 만세운동이후 태형으로 사망했다는 증거가 없었고 태형 90대 이상은 유공자 선정대상이지만 박동희 선생은 60대의 태형을 받아 추서하기 곤란해 사망시점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손자 박정만씨가 청산면 31.1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故 박동희 선생의 대통령 표창장을 전수받았다. / 옥천군<br>
손자 박정만씨가 청산면 31.1운동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故 박동희 선생의 대통령 표창장을 전수받았다. / 옥천군

박동희 선생의 사망시점은 태형을 받은 1919년 4월 3일(범죄인명부 기록) 이후 5개월 뒤였다는 것이 만세운동을 함께한 주민과 유족들의 증언이다.

하지만 박연호씨의 할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알지 못했고 일제강점기 시대에 신고 절차 등을 제대로 몰라 뒤늦게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에 호적에는 사망후 5년 뒤인 1924년 6월8일 사망으로 기록된 것이 문제가 됐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박동희 선생의 부인인 김영희 할머니는 홀로 어렵게 키운 외아들 박주현(사망)씨에게 선친의 명예회복을 유언했다.

박주현씨는 할머니의 유지를 받아 박동희선생의 수감 자료를 찾아 보았지만 6.25전쟁당시 서류일체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아 눈물을 훔치며 돌아섰다고 한다.

손자 박연호씨는 할머니의 유지에 따라 독립만세운동을 함께했던 여도근, 임해용, 이호용, 박철희, 박석희, 박도희씨 등의 인우증명서를 작성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받아 들여지 않자 지속적으로 재심의를 요청했다.

박연호씨는 "할아버지의 독립만세운동의 사실들이 구체적이고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서류상 절차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와 태형 90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되고 60대는 형량미달이라는 검증 잣대가 너무나 불합리하다"며 "중요한 것은 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고 태형을 맞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한을 풀어 달라는 선친의 유훈을 받들게 됐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故 박동희 선생 대통령 표창. / 옥천군
故 박동희 선생 대통령 표창. / 옥천군

세상을 떠난 지 100년 가까이 돼서야 박 선생의 공적을 인정받은 지금, 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후손은 물론, 청산면 주민과 공무원의 노력이 컸다는 점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 

청산면장을 역임한 신한서 전 면장(2012년 1월 1일부터 2014년 7월 31일까지 재임)은 2013년 7월 우연히 서고에서 일제강점기 때 작성된 범죄인 명부를 발견했다. 

명부에는 1919년 3월 청산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형을 받은 기록들이 성명, 직업, 판결일, 형량 등과 함께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일부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으나 태형 미달 또는 증거 불충분 등으로 박 선생을 포함해 몇몇의 소중한 희생은 인정받지 못한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청산면장을 역임한 전재수 현 주민복지과장(2017년 1월 1일부터 2018년 7월 8일까지)과 이갑기 청산면민협의회장도 인우보증과 각종 사료 수집에 힘을 쏟았다. 

박연호씨와 큰형 박정만씨 등 손자들을 비롯한 신한서 전 청산면장과 전재수 현 주민복지과장, 이갑기 청산면민협의회장 등이 수형인명부 등 각종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탄원서를 제출하며

노력해 온 결과, 지난달 10일 보훈처 국가유공자 심의회를 통과하며 정식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결국 5년 만에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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