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전 대전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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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매일 중부시론 표언복] 일제는 한반도를 침략하면서 참으로 해괴한 논리를 조작해 냈다. 예컨대 일본과 조선의 민족은 같은 조상 밑에서 갈라져 나온 동족이라는 '일선동조론', 한반도는 주체적 독립성을 지닐 수 없다는 '타율성론', 중세와 근세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은 한반도는 여전히 고대사회의 후진성에 머물러 있다는 '정체성론(停滯性論)', 반도국가의 특성상 대륙세력이나 해양세력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반도성론'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당대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을 앞세워 조작해 낸 논리치고는 유치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지만, 여기에 곁들인 '당파성론'만큼은 뼈아프다.

편 갈라 싸우기를 잘하는 민족성 때문에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인데, 그럴지라도 그것이 남의 나라를 침탈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으니 억지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당파성 때문에 나라가 어려움을 겪고 위난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기에 절통하다는 말이다. 당파성이 국가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만큼 꼭 흘겨봐야 할 것만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엔 망국의 요인이라 할 만큼 극단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팔도의 인심까지 변하게 한 당쟁의 폐해를 개탄하면서 그 실상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조정의 윗자리에 소론·노론·남인 간의 원한이 날로 깊어져, 서로 역적이라 부르며 모략하고, 그 영향이 아래 시골까지 미쳐 큰 싸움터가 된 지경이다. 파가 다르면 서로 혼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 서로가 서로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 상황이다. 다른 파벌이 또 다른 파와 친해지면 지조가 없다거나, 항복했다고 비난하며 서로 배척한다. 건달이 되었건 종이 되었건 한번 아무개 집 사람이라고 말하면 비록 다른 집을 섬기고자 하여도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택리지)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노예로 끌려가게 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푸 겪었으면서도 편 가르고 패 나누어 싸우는 당쟁의 실상이 이러했다. 서구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바탕으로 힘을 기른 열강들이 식민지 경영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에도 허약한 이 나라 왕조는 오로지 당쟁에만 몰두해 있었고, 제국주의 침략의 마수가 한반도 심장부 깊숙이 뻗쳐 들어오고 있는 때에도 수구파와 개화파가 나뉘고, 친일파, 친청파, 친로파가 갈리어 집안싸움만 일삼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라가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도 고질이 된 파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풍찬노숙을 마다않고 망명길에 오른 독립운동가들도 패 갈라 싸우는 일에 이골이 나 있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그 때 벌써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심지어는 왕조시대의 해묵은 4색이 상해 임시정부 안에 그대로 재현됐다. 하와이에서는 이승만파와 박용만파가 갈리고, 상해,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는 친일 밀정들과의 싸움이 힘겨웠다. 이런 가운데 정작 일제가 아닌 제 나라 제 동포의 총탄을 맞고 숨진 독립운동가가 한둘이 아니다. 이 같은 파쟁은 해방 정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결국 나라는 분단돼 동족끼리의 전쟁까지 치른 뒤 오늘에 이르러 있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나라의 흥망성쇠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국론분열과 내분이다. 깨어진 틈새로는 물이 스미게 마련이고 갈라진 벽으로는 바람이 들게 마련인 것. 어느 조직이나 집단이든 내분 상태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외침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진리다. 국가도 예외일 수 없다. 국가 발전을 저해하고 외압에 취약케 하는 제1의 적은 파쟁이다. 고대국가 시대부터 되풀이해 온 이 망국적 파쟁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적폐 중의 적폐가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차가 되도록 계속되는 '적폐 청산'드라이브는 명백한 파쟁일 뿐이다. 앞선 정권 때 있었던 해묵은 일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시비하며 뒤집으려 드는 게 모두 정치적 보복이고 앙갚음이라 비난한다면 억울하겠는가? 청산은 지난 죄를 물어 벌주기보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제대로 된 청산이다. 시대가 엄중한데 여전히 나라 망치는 파쟁에 몰두해 있는 이 적폐부터 청산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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