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의 수필가

클립아트 코리아

남북 정상회담 날 세계인의 눈이 판문점으로 모였다. 나도 역사적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않았다.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마음은 같았다.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두 손이 화면에 비추기도 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인의 애달픈 목소리도 들린다.

생중계를 지켜보던 얼마 후 살짝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는 김정은 위원장 모습이 비췄다. 잠깐이었다. 어색할 때 하는 행동으로 시진핑 주석과 처음 만날 때도 어색한 순간에 주머니를 만졌다고 한다. 바지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서서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뺐다. 내 집에서 나 혼자 있는데도 긴장했나보다.

외삼촌은 6·25 때 대학생이었다. 식구들 몰래 자진 납북했다. 외아들이었기에 외조부님 상처는 깊었고 외삼촌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친정엄마는 북측 남동생을 말하지 않았다.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질 때도 보고 싶다는 말씀조차 없었다. 엄마 마음을 알 수 없어 마치 남의 일인 양 지켜보았다. 북측에 외삼촌이 살아계신다면 만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는 동안 손은 주머니 깊숙이 들어갔을 것이다.

파랑새는 제일 좋아하는 쇠똥구리를 잡아다가 구애한다. 쇠똥구리는 우리나라에서 사라지고 있어 멸종위기야생동식물 2급으로 지정되었다. 파랑새 구애방법이 환경에 적응할지, 보기 힘든 쇠똥구리를 찾아다닐지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함께 견주어 본다. 손을 주머니에 넣는 김 위원장 행동은 이후 없었다.

주머니는 손을 보호하기도 하고 제약을 주기도 한다. 개인적인 취향의 멋을 주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주머니는 인격과 권위를 대변한다.

며칠 전 본 드라마다. 둘은 동갑이고 안면이 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 사이 한 사람은 상사가 되고, 부하직원이 된다. 서로 첨예한 신경전은 상사인 갑이 우선순위다. 그는 고압적인 행동과 언행으로 을을 제압한다. 갑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반쯤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손은 자유롭지 못하다. 대신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손동작이 보이지 않아서 을은 두려움을 느낀다. 갑의 주머니는 곧 신분이다.

내 첫 기억 주머니는 작은 할머니 고쟁이 주머니다. 할머니는 내 앞에서 치마를 올리고 속바지를 내리고 다시 속옷 안쪽에 있는 주머니를 열었다. 속옷을 겹겹이 벗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주머니가 빨리 나왔으면 싶었다. 그럴수록 할머니 행동은 느렸고 지쳐서 딴 짓을 할 때쯤 사탕 한 개가 나왔다. 할머니 고쟁이 주머니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내 눈빛을 허락한 할머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열쇠 꾸러미가 먼저 잡혔다. 사탕 몇 알, 돈과 함께 곡식도 들어 있었다. 새까맣고 낡은 주머니에서 느끼던 할머니 체온은 지금도 훈기가 돈다.

해외여행을 준비하는데 수필가 k선생이 현대식 고쟁이라며 주머니 있는 팬티를 선물했다. 여행하는 나라 치안을 걱정한 마음은 고맙지만 어색하고 창피하여 입지 않았다. 고쟁이 주머니는 속바지가 길어야 제격이다. 그래야 깊게 만든다. 체형과 쓰고자 하는 용도에 맞게 나만의 주머니를 만든 것은 삶의 지혜였다. 가족의 식량을 책임지는 곳간 열쇠 위력은 주머니에서 나왔고 주머니를 갖는다는 것은 자긍심이고 힘이기도 했다.

주머니 중에서 가장 달콤한 주머니는 연인들 주머니다. 잡은 손을 주머니에 함께 넣고 걷는 연인을 보면 괜한 질투가 난다. 젊어서 부럽고 함께 손잡고 걷는 살가운 거리가 부럽고 주머니 안에 함께 들어간 두 손이 부럽다. 주머니 안에서 맞잡은 손은 대화를 대신한다. 함께 가는 길에 꼭 잡을 수 있는 손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주머니가 있어 둘은 다정해질 것이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주머니는 새로운 것이 발견되는 경우다. 남편 양복 안주머니에 달라붙듯 숨겨진 빳빳한 돈, 커피숍 영수증, 학생이 색종이로 접어준 작은 별, 반가운 필체의 메모지, 생기 잃은 나뭇잎…. 사라진 내 기억을 찾아주는 주머니가 있어 안전하고 위안이 된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아일랜드 금언이다. 생전에는 버는 것은 즐거워할 일이나 하늘에 오를 때는 모두 기부하고 가벼운 마음이 되고자 하는 민족성이 담겨 있다. 인도 승려들이 입는 승복의 사프란 빛깔도 원래는 수의 색깔이었다. 수의 색깔 옷이니 주머니가 없다. 갖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욕망과 치부를 감추기 위해서는 주머니가 필요하고 안전하다. 마음을 숨기기는 좋은데 많으면 모두 드러난다. 가진 것을 내려놓는 무욕의 삶에는 마음 속 주머니를 없애는 용기가 필요하다. 텔레비전 생중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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