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로 노래한 고산 8경·역사소설 쓴 홍명희의 고향

동진천을 아우른 괴강은 충민사(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그의 숙부 문숙공 김제갑(金悌甲)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보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 고산9경이 고산8경으로 변해

동진천을 아우른 괴강은 괴산읍 제월리로 흘러내려간다. 제월리라는 마을 이름은 고산(孤山)에 있는 제월대에서 나왔다. 제월(霽月)은 비갠 후 나온 밝은 달을 의미한다. 1596년과 1602년 두 번이나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유근(柳根 : 1549~1627)이 제월리 고산에 은거해 만송정(萬松亭)과 고산정사(孤山精舍)를 짓고 살았다. 그로 인해 제월대는 스토리텔링이 많은 명승이 될 수 있었다.

괴산에 낙향해 있던 유근은 1604년 좌참찬으로 정계에 복귀한다. 그리고 1606년 대제학으로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한다. 이때 주지번(朱之蕃)이 정사(正使)로, 양유년(梁有年)을 부사(副使)로 왔다. 그들과 친교를 맺은 유근은 그들에게 고산은거도(孤山隱居圖)를 보여주었고, 그들로부터 글씨와 시문을 받고, 또 이들 시에 차운해 시를 지었다.

그것이 주지번의 시문 '고산은거도'와 글씨 '호산승집(湖山勝集)'이다. 양유년은 '만송정구경시(萬松亭九景詩)'를 지었으니 그것이 나중에 고산구경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산구경은 다음과 같다. 만송정, 황니판(黃泥坂), 관어대(觀魚臺), 은병(隱屛), 제월대(霽月臺), 창벽(蒼壁), 영객령(迎客嶺), 영화담(暎花潭), 고산정사. 그런데 고산정사가 1695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때문에 고산8경만 남게 되었다. 고산8경을 노래한 시조가 '괴산군지(1990)'에 전해진다.

"제월대에 비 개이고 만송정에 청풍 드니 영객령에 손 들어온다.

창벽에 푸른 송취(松翠) 영화담에 비친 꽃을 관어대서 구경할 제

황니판에 낙조 들고 은병암에 달 솟으니 시인소객(騷客) 갈길 늦네."

고산정과 제월대는 현재 충청북도기념물 제24호로 보호받고 있다. 고산정은 근래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시 지어졌다. 정자 안에는 고산정이라는 이원(李元)의 편액과 호산승집이라는 주지번의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고산정사기, 주지번, 양유년, 유근, 권병섭의 시문이 걸려 있다. 고산정에 오르면 가까이 영화담을 내려다볼 수 있고, 멀리 괴강 상류쪽을 조망할 수 있다.


# 홍명희 문학비가 이곳에 세워진 까닭은?

홍명희 문학비.

제월대 주차장에는 벽초(碧初)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홍명희는 괴산읍 역말에 있는 홍범식 고가에서 태어났으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체포되면서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모두 풍산홍씨 묘막(墓幕)이 있는 제월리 산수골로 이사하게 되었다. 현재 제월리 산수골에는 홍명희의 고조부부터 부모까지 묘소가 있다. 그런 인연으로 1998년 10월 이곳 제월리에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문학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번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임꺽정'은 홍명희의 대표작이다. 역사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이다. 주인공 임꺽정과 의형제를 맞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양반과 탐관오리의 잘못을 징벌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또한 그가 언급한 것처럼 언어와 문체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고 살리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 능촌리 취묵당 찾아가기

취묵당.

제월리에서 괴강을 따라 내려가면 능촌리가 있다. 능촌리는 능처럼 큰 무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안동김씨 세거지로 마을 뒷산에 백현능원(柏峴陵苑)이 있다. 이곳에 충무공 김시민(金時敏:1554-1592)과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1581~1643)의 증조모, 조부 등의 묘소가 있다. 그리고 능원 가까운 곳에 김시양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김시민을 기리는 사당 충민사 역시 이곳에서 2㎞쯤 떨어진 곳에 있다.

능촌리 안동김씨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김시민, 김시양 그리고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1604~1684)이다. 김시민은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로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으로 유명하다. 김시양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 살았던 문인으로, 병조판서, 도원수 등을 맡아 난국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정치가였다.

김득신은 김시민의 손자로 괴산에서 태어났다. 부지런히 공부하는 노력형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학업에 힘써 사서삼경을 만 번 이상 읽고, '사기(史記)' <백이전(伯夷傳)>을 십 수만 번 읽어 당호를 억만재(億萬齋)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다. 39세(1642년)에 진사가 되었고, 59세(1662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니 말이다. 예조좌랑, 장악원정 등을 제수받았으나, 고향인 능촌리로 낙향해 괴강가에 취묵당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현재의 취묵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1979년 해체·복원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편액과 기문, 시문이 걸려 있다. 그 중 백곡이 쓴 '취묵당기'와 '괴협(槐峽) 취묵당 팔영(八詠)'이 유명하다. 취묵당 팔영은 취묵당 팔경을 노래한 오언율시다.

이들 시는 취묵당에서 바라본 서경과 서정을 노래했다. 백곡의 시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취묵당의 강쪽 기둥에 새겨진 주련 형식의 오언절구 '용호(龍湖)'다. 가을날 저녁 차가운 비가 내리고, 강에 풍랑이 일어 어부가 급히 배를 돌리는 모습을 노래했다.

"차가운 구름 고목을 감싸더니 古木寒雲裏
가을산에 하얗게 비가 내리네. 秋山白雨邊
저녁나절 강에 풍랑이 일어 暮江風浪起
어부들이 급히 배를 돌리네. 漁子急回船"



# 괴강 건너 충민사로 가는 다리 놓였다

충민사와 김시민 장군묘.

취묵당을 지난 달천은 이제 하류쪽 충민사로 흘러간다. 취묵당에서 충민사까지는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능촌리를 거쳐 충민사를 찾아가지 않는다. 길이 좁고 멀어 찾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19번 국도 감물면 오성리에서 충무교를 건너가는 것이 더 빠르고 편리하다. 그것은 1994년 괴강에 충무교가 놓이면서 가능해졌다.

충민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과 그의 숙부 문숙공 김제갑(金悌甲)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2호로 지정되었고,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충민사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안에 김시민 장군 영정, 시호교지, 진주성촉석루도가 모셔져 있다. 충민사에서 보면 괴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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