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두 소년이 마주한다. 흐릿한 조명등 아래 현재의 소년이 과거의 '소년少年'을 바라본다. 소년은 세월의 더께에 빛바랜 겉옷을 입고 누운 옛 소년을 응시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기가 느껴지는 공간인데도 아랑곳없이 자못 진지하다. 부모의 설명을 듣는 소년의 상기된 모습이 한 세기를 뛰어넘는 동무, 잡지 창간호 '소년少年'과 아주 특별한 만남으로 다가온다.

전시대 속에 놓인 '소년少年' 잡지를 바라보는 소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책이 지닌 문학적 가치와 위치를 알기나 할런지 궁금하다. 하긴 어린 학생이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작은 책 한 권에 담긴 숱한 사연을 알리는 만무하다. 또한 전시 공간을 찾은 많은 관람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 한 그냥 스쳐 지나쳤으리라.

'소년少年'은 육당 최남선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잡지이다. 그는 미래의 주역인 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고, 서양의 신문물을 보급하기 위해 출판 사업이 절실함을 깨닫는다.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이 잡지가 신문학 초창기에 남긴 문학사적 공헌도와 계몽적인 역할은 지대하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붉은 바탕의 태극기 문양으로 상단을 두르고 녹색 글씨로 쓰여 있다. 망국의 암울했던 시기에 새 시대를 열어갈 소년에 대한 꿈과 희망이 서린 잡지이다.

내가 이 책과 인연이 닿은 것은 청주예술의전당에 마련한 '충북문인 육필원고 및 문학도서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1996년 충북예술제 일환으로 한국 문학 100년을 돌아보는 문학도서 전시회는 한국 문학의 발자취와 현주소를 살피는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만남전'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신문화의 개척자요, 선구자인 육당의 역작들을 모아 '육당 최남선 선생 저서 특별전'도 마련했다. 이 전시회가 청주 시민과 언론 매체의 커다란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육당 선생의 넷째 아드님인 최한혁 선생님 덕분이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빌린 책들을 돌려 드렸다. 최 선생님께서는 고마움의 정표라며 선물로 육당의 혼이 배어 있는 '소년少年' 창간호를 건네주셨다. 아들 입장에서 선친의 혼을 되살리는 전시회를 마련하였으니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떨리는 양손으로 잡지를 받았던 그 순간의 감격과 환희는 평생을 두고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나에게 '소년少年'은 그간 간절히 원하고 꿈에 그리던 책이었다.

두 소년을 만난 곳은 도서전이었다. 문학도서전은 젓가락페스티벌 일환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전시장 안은 공간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여섯 작가들의 작품을 꾸며놓았다. 도서전은 입구 우측 코너에 ㄱ자형으로 벽면과 평면으로 구성되었다. 딱지본, 문학 창간호, 수필집, 소설, 시집은 벽면에 설치하고 바닥엔 아크릴을 덮은 전시대를 마련하고 귀중한 고서를 펼쳐놓았다. 전시장이 은은한 조명으로 더욱 고즈넉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관람객이 계곡을 흐르는 급류처럼 밀려들었다. 전시장을 휘돌다가 도서전시장 앞에서는 바다로 유입되는 강물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희귀본이 펼쳐진 전시대에 다가서는 그네들의 눈길이 빛났다. 왁자지껄 소란스럽던 대화도 멈춘 채 침묵이 흘렀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실물을 접한 감격스러움 때문이리라.

책은 시대를 담는 지식의 보물창고이다. 책을 통하여 그 시대의 삶과 문화를 살펴보고 세상과 소통하며, 새로운 미래를 여는 창조의 지혜를 배운다. 전시대 마련된 문학도서, 희귀본들은 지나온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일깨우고, 시대상을 조명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나아가 사라져가는 근현대 고서들을 모은 전시회를 통하여 교육의 도시, 청주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정녕 꿈은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돈이 있다고 이 세상 모든 원하는 책들을 수중에 넣을 수는 없다. 경제적인 능력과 책에 대한 안목이 뛰어나더라도 원만한 인간관계와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천하의 희귀본은 얻지 못한다. 그 당시 최고의 고서수집가이자 장서가였던 육당의 기를 받아서일까. 최 선생님과 만남으로 내가 원하던 책들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라 여겨진다.

인간의 만남은 단지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진다. 그 만남이 어떤 만남이냐에 따라 우리네 삶이 더욱 알차고 풍요로워지는가 보다. 책을 통하여 '소년少年'을 만나고, 역사 속 육당선생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전시대 속 '소년少年'을 만난 소년의 상기된 표정이 떠오른다. 도서전에 관람객으로 와 생경한 책을 접한 소년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그 시대에 대표할 잡지인 '소년少年'을 발간한 육당이 암흑기에 한줄기 빛으로 소년들에게 길을 열었듯이, '소년少年'과 조우한 소년이 다가올 미래에 큰 물줄기를 트는 사람이 되길 빌어본다.

'소년少年' 창간호를 보물덩이처럼 애지중지하며 보듬는다. 가끔 책장을 펼칠 때면 사진 속 육당 선생의 잔잔한 미소를 느끼곤 한다.

 

강전섭 수필가
강전섭 수필가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청주문화원 이사
▶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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