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컬쳐디자이너·에세이스트

지난해 추석 9월 15일 오후 서울 은평구에서 바라본 밤하늘에 보름달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2016.09.15. / 뉴시스
지난해 추석 9월 15일 오후 서울 은평구에서 바라본 밤하늘에 보름달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2016.09.15. / 뉴시스

[중부매일 문화칼럼 변광섭] 그날 저녁 보름달이 온 동네를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는 기억을 되찾아주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탕마당과 팽나무, 그리고 보름달이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 보름달이 가득 찬 날 만나기로 했다. 벌써 30년이나 됐다.

탕마당은 악동들의 놀이터였다. 차고 톡 쏘는 약수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뒤 마시고 등목을 했다. 약수가 온 몸에 닿기만 해도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곳에서 밤늦도록 놀았다. 숨바꼭질, 줄넘기, 딱지치기, 자치기, 공놀이, 윷놀이…. 추석이나 설날, 그리고 백중일에는 인근 마을 사람까지 몰려와 풍물놀이를 시작으로 장이 섰고 점방과 기생집과 야바위꾼이 진을 쳤다.

탕마당 바로 옆에는 300년 된 팽나무가 있다. 5월이면 어김없이 홍갈색 꽃이 피는데 취산꽃차례를 이룬다. 가을이 되면 적갈색의 작은 열매가 열린다. 먹을 때는 씨를 빼내야 하는데 그 때마다 '팽'소리가 난다. 그래서 팽나무다. 어른들은 일 년에 꼭 한 번, 이 나무에서 꽃이 피어 꽃향기가 절정에 이르는 날 밤, 그 향기를 맡으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옛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래서 봄 여름 가을에는 이곳에 평상을 깔아놓았다. 집 없는 사랑방인 것이다.

보름달이 뜨면 숲으로 뒤덮인 온 동네가 훤하게 밝았다. 앞집 뒷집 개 짓는 소리에, 구라산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바람의 군단에, 초가집 기와집 할 것 없이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 꽃 피우는 소리에 보름달도 절로 흥이 났는지 붉게 빛났다. 뒷산의 도토리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대추가 붉게 익을 때마다 보름달은 온 몸을 활짝 열었다. 그 때마다 악동들은 탕마당에서 작당을 했다. 오늘은 누구네 집 장독대를 털 것인지, 어느 밭을 어슬렁거릴 것인지…. 시골의 밤은 언제나 악동들의 것이었다.

지나간 추억도 희망이라고 했던가. 일 년에 한 번, 보름달이 가득 찬 날 친구들이 만나면 그날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 때의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시간이 갈수록 기억마저 쇠잔해지는데 만날 때마다 무슨 할 얘기가 많은지, 추억이 없으면 삶의 풍경이 만들어질까 싶을 정도다. 모든 풍경 속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듯이 그날의 추억엔 미련과 아쉬움이 왜 없을까만 지나고 나면 아름답고 소중하다. 애틋하다. 내겐 가난한 날의 축복이었고, 빛이었고, 거름이었다.

그런데 지천명을 넘으면서 친구들의 표정과 이야기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건강과 가족과 일거리에 대한 아픈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교통사고와 지병으로 운명을 달리한 친구도 있다. 암 투병을 하거나 성인병으로 시름겹거나 뼈마디가 성치 않아 병원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아졌다. 추억이 하나씩 잊혀져가고 사라질 때 몸까지 덩달아 야위어갔다. 중년의 아픔이 시작된 것이다.

부모들은 돌아가시거나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평생을 땅과 함께 살아온 분들이다. 농사를 경전으로 알며 온 종일 논과 밭에서 피땀 흘려왔으니 온 몸이 주름지고 세월의 무게만큼 허리도 고꾸라졌다. 구릿빛으로 가득한 수척해진 모습이 당신의 모든 것을 웅변한다. 부모 걱정 끝나기 무섭게 자식 걱정이 태산이다. 취직을 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다. 부모 걱정에 자식 걱정까지 중년의 친구들은 보름달을 보는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

어디 이 뿐인가. 나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하나 둘 삶의 최전선인 직장에서 퇴직하기 시작했다. 오지 않은 날에 대한 두려움 가득했다. 새로운 일터를 찾아야 하고 가족을 보듬어야 하며 건강을 챙겨야 한다. 더 큰 시련과 고통이 밀려올 수 있다. 하여, 우리는 이왕이면 기쁘게 살자며, 건강하게 살자며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주었다.

변광섭 에세이스트
변광섭 에세이스트

집으로 가는 길에 보름달이 골목길을 밝히며 길동무가 돼 주었다. 인생 다 그런 거라고,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모든 풍경에는 상처가 깃들어 있으니 삶의 향기 만들자고 한다. 천근만근이었던 내 마음에도 달이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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