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홍명희 문학비.
홍명희 문학비.

[중부매일 아침뜨락 모임득] 고택은 적요했다. 고가의 정적 속에는 오랜 시간이 지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흐르는 듯하다. 풀 한포기 없는 마당, 책처럼 쌓인 기와가 번성했던 시절을 추억한다. 기와 위로 땡감이 익어가고 있다. 충북 괴산읍 동부리(임꺽정로 16)에 위치한 홍범식 고택.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택인 만큼 세월과 함께 배어 든 주인의 사상과 문화가 있다. 이곳은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한 금산 군수 일완 홍범식(1871-1910)선생의 고택인 동시에 '임꺽정'의 작가인 그의 아들 벽초 홍명희(1888-1968)의 생가이다.

홍명희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었다가 생가를 복원해야 한다는 뜻이 모아지면서, 복원을 위한 꾸준한 노력 덕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툇마루에 앉아 홍명희 선생의 문학적 향기를 느껴 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툇마루를 걸쳐갔을까? 변한 게 많은 고택이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매년 찾아오는 가을 햇살일 것이다.

사랑채는 괴산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고 전하는 만세운동 유적이다. 홍명희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괴산군민들과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을 모의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눈길이 더 간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일로 홍명희 선생은 옥살이를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학자, 소설가, 정치인으로 격랑의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선생은 월북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조차 올리면 안 되었다. 1988년 월북문인 해금 조치에 따라 국내에 다시 소개된 ?임꺽정?은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옥에서 나온 홍명희 선생은 선산이 있는 제월리로 이사를 하여, 1924년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다. 1928년부터 '임꺽정'을 집필해서 '조선일보'에 연재했으니 괴산에서 살 때는 작품 활동과 큰 연관이 없다. 하지만 작가의 문학적 감성을 키워준 것은 고향 괴산의 풍광이 아닐까 싶다. 제월리 집 부근에 제월대가 있다. 이곳에 문학비를 세우는데 홍명희 선생의 월북과 북한에서의 행적 등으로 인해 건립 자체를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강하게 대립했다. 1998년 문학비를 세웠으나 철거됐고, 이후 협의를 거쳐 2000년에 다시 건립하게 됐다.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넓은 공간에 문학비는 가장자리에 놓여있고 줄그어진 주차장만 휑하니 있어 씁쓸하다. 문학비 앞에는 시민들의 소망을 담은 노둣돌도 마련해 놓아 선생을 추억하며 읽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임꺽정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쓰인 돌을 보며 마음이 결연해진다.

홍명희와 그의 소설 '임꺽정'을 기리는 문학제가 벌써 스물세 해째를 맞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22회중 8회가 괴산, 청주에서 개최되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인 파주에서 열려 많은 아쉬움이 있다. 우선 지금까지 지역작가이면서도 관심을 많이 갖지 못한 나부터 반성을 해 본다. 다행히 올해는 10월 27일 청주에서 열려 꼭 참석하려고 한다. 오늘도 작가가 즐겨 찾던 제월대 앞에 괴강은 여전하다. 작가가 살던 시절에도 강은 흘렀을 테고 지금도 여울을 이루며 흐른다. 이념갈등, 뿌리가 깊다. 역사는 무심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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