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전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결혼식. / 클립아트코리아
결혼식. / 클립아트코리아

일제 강점기에 반복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문난 미두 재벌이었다. 미두(米豆)란 일종의 '선물거래'형식의 투기적인 미곡 거래였다. 요즘 말대로 더러는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쪽박을 찼다. 강화도 이방(吏房)의 아들로 태어난 반복창은 열두 살 나이에 부친을 잃고 집안이 기울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미두 중매점을 하던 일인의 심부름꾼으로 시작한 그는 직접 미두판에 뛰어들어 일약 '미두계의 패왕'으로 성장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재산은 무려 40만 원, 지금 돈 400억 정도에 달했다. 그런 그가 전무후무한 초호화판 혼례식을 올렸다. 1921년 5월 28일, 지금의 소공동 조선호텔. 이때 반복창의 나이 겨우 스물한 살, 상대는 여고보를 나온 미모의 인텔리 김후동이었다. 반복창은 이날 경인선 급행열차 한 대를 통째로 대절했다. 그것도 2등석 특별열차였다. 인천 부윤 요시마쓰(吉松)를 비롯해 인천 시내 유력인사들을 망라한 하객들을 이 열차로 실어 날랐다. 경성역에서는 6,70대의 자동차가 동원되어 이들을 식장까지 실어 날랐다. 조선호텔 대연회장에서 열린 혼례식 비용은 모두 3만 원, 지금 돈으로 30여억 원에 달하는 액수였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생활은 겨우 6년에 그쳤다. 거듭된 미두 실패로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고 이곳저곳 노름판을 굴러다니는 신세가 되자 아내 김후동은 1927년 반복창의 곁을 떠났다. 슬하의 세 아이는 모두 중풍으로 반편이 된 몸에 정신까지 들락날락하는 반복창의 몫이 되었다. 1939년 10월, 그는 허름한 움막집에서 쓸쓸히 일생을 마쳤다. 서른아홉, 아까운 나이였다. 그가 남긴 것은 오직 '최초의 초호화판 혼례식'이랄까.

호화판 혼례식 풍조가 좀체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예전부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모 중앙 일간지가 앞장서 '작은 결혼식'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런 사례들이 많았다. 허례허식을 떠나 소박하지만 내용은 알차고, 조촐하지만 뜻은 깊은 혼례가 얼마든지 가능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지만 세태는 '큰 결혼식'이 대세가 된 느낌이다. 사회 지도층이나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공인'들이 앞장서 모범을 보일 만한 일이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 신분이던 2014년 그는 혜화동성당에서 양가 가족과 소수의 지인들만 참석한 가운데 혼배성사를 올렸다. 청첩장에 양가 부모의 이름을 빼고 화환이나 축의금은 사절했으며 방명록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교안 전 국무총리도 이 점에서 치하가 많았다. 현직 법무부장관으로 총리 내정자 신분이던 2015년 5월, 대검찰청 별관에서 치른 아들의 혼례식에 청첩장을 내지 않았으며 화환과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알음알음 찾아온 하객만도 5백 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청첩은 없었어도 그냥 말 수는 없었던 것일까. 후진적 혼례 문화로부터 자유롭기도 쉽지는 않은가 보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이들과는 달리 지난 여름, 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딸의 결혼식 문제로 사람들의 입과 혀에 올랐다.'요정정치의 산실'로 알려진 고급음식점 삼청각에서 열린 혼례에는 국회의원 40여 명을 비롯한 당.정.청 주요 인사들과 추 대표가 추천한 지방선거와 보궐선거 당선자들이 대거 참석하여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연히 여론은 곱지 않았다. "집권 여당의 대표가 청첩장을 내고 결혼식을 해야 하는가". 야당의 박지원 의원이 한 말이란다. "실세 중 실세인 집권여당의 대표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녀 혼사를 치렀다면 어땠을까, 뒤늦은'미담'이 알려졌다면 추 대표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지 않았을까. "현장에 있었다는 한 일간지 기자가 쓴 글 중의 한 대목이다. 진보 정권의 장래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알리는 어두운 징조로 읽어낸 논자도 있었다. 집권 세력의 도덕적 허약성을 우려한 것이었다. 자신은 사절한 화환을 남의 혼례에는 보낸 대통령이나, 다른 사람들의 화환은 사절하면서 유독 대통령이 보낸 화환만은 앞에 내세웠다는 당 대표가 모두 도덕적 정체성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독야청청, 홀로 옳고 바른 체하며 말로만 국민을 위하는 구두선을 지양하고 작은 혼례식 하나라도 솔선하는 지도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3포세대'의 눈물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바야흐로 혼례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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