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의 음악·신립의 전투·권태응의 문학을 지나서
달래강, 탄금대서 한강과…합류 3대악성으로 꼽히는 우륵 거처
'팔천고혼위령탑'에 남은 기록 '감자꽃' 권태응 배출 재조명도

탄금대는 한강과 합류한 달래강의 하구종점이 된다.

# 요도천과 충주천은 어디서 오는가?

달래강은 이제 달천교를 지나 탄금대 방향으로 내려간다. 방향은 북쪽이다. 달천교가 놓인 자리는 옛날 달천나루가 있던 곳이다. 대소원 방면에서 충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애물이 달래강이었다. 과거 이곳을 건너려면 나룻배를 타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철교와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이곳이 나루였음은 나루 동쪽에 있는 선정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선정비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사람들 통행이 많은 교통의 요지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달래강을 따라 양쪽으로 둑이 쌓이고 그 위로 도로가 만들어졌다. 그 길은 탄금대까지 이어진다. 달천교 동쪽 충주 시내쪽으로 넓은 들이 펼처져 있으며 충주분지로 불린다. 그러나 충주 사람들은 이곳을 달천들과 모시래들이라 부른다. 달천교에서 더 하류로 내려가면 탄금대에 이르기 전 두 개의 하천이 달래강에 합류된다. 하나는 대소원면 검단리 쪽에서 내려오는 요도천이고, 다른 하나는 봉방동 쪽에서 내려오는 충주천이다.

요도천은 부용산 또는 수레의산에서 발원해 신니면 주덕읍 대소원면을 관통해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길이가 25㎞로 주덕읍 지역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한다. 충주천은 발티에서 발원해 충주 시내를 관통해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길이가 11㎞로 직동 호암동을 지나 충주시내를 관통한다. 충주천의 지류인 교현천은 계명산과 남산 아래 안림동에서 발원해 교현동을 지나 대봉교 위에서 충주천과 합류한다.

 

#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한 탄금대

우륵 동상.

달래강은 탄금대에서 한강과 합류한다. 그러므로 달래강의 하구종점이 탄금대가 된다. 탄금대는 말 그대로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다. 그럼 누가 가야금을 연주했을까?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하나로 불리는 우륵이다. 그는 원래 가야 성열현(省熱縣) 사람이다. 가야의 가실왕 때 왕명을 받아 가야금곡 12개를 지었다. 가야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귀화해 국원경(國原京:충주)에 거처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그러면 국원의 어디에 살았을까? 그것은 지명을 통해 탄금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륵은 탄금대에 거주하면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제자를 길러낸다. 그 제자가 가야 시절부터 음악을 함께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문(泥文)이다. 이들 두 사람은 551년 진흥왕의 낭성(娘城) 순수 때 하림궁(河臨宮)으로 불려가 새 노래를 연주해 보인다.

그 후 진흥왕은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을 국원의 우륵에게 보내 가야금을 배우도록 한다. 우륵은 제자들의 재능에 따라 가무악(歌舞樂)을 나눠 가르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우륵 이후 음악의 전문화가 이루어진다. 우륵은 탄금대를 중심으로 한강을 오르내리며 자신의 음악을 펼친 것 같다. 그가 가야금을 즐겨 연주한 정자들의 이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탄금대에는 최근에 복원된 탄금정(彈琴亭)이 있다. 탄금대 다리 건너편 금강사 자리에는 청금정(聽琴亭)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이름 그대로 가야금을 듣는 정자라는 뜻이다. 여기서 다 하류로 내려가면 금가면 월상리에 옥강정(玉江亭)이 있다. 그리고 하담리에는 사휴정(四休亭)이 있다. 우리는 이들 정자 이름을 통해 우륵의 자취를 추론해 볼 수 있다.

 

탄금대에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

# 탄금대전투에서 신립과 조선 병사가 전멸했다?

탄금대 역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 우륵이라면, 두 번째로 언급되는 인물은 신립이다. 신립은 조선시대 무장으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으로 유명하다. 배수진이란 최후의 결전을 위해 강을 등지고 싸우는 전법이다. 조선군은 한강을 등지고, 달천벌에서 일본군과 싸움을 벌였는데, 참패하고 말았다. 이때 숨진 조선의 병사가 팔천 명이라고 한다.

그러한 사실은 탄금대에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기록 '서정일기(西征日記)'에 보면 3천 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포로가 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군이 이처럼 패배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정규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령탑 앞의 동상이나 뒤쪽에 새겨진 조각을 통해 조선군은 비정규군이나 농민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전국시대 전투로 단련된 무사들이었다.

충주를 노래한 시인묵객들은 탄금대를 찾아 수 많은 시문을 남겼다. 노수신, 유성룡, 정구, 이식, 정약용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시에서 신립의 패배를 한탄하며 안타까운 생각과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했다. 탄금대 전투 후 10년이 지난 1602년 충주목사로 부임한 한강(寒岡) 정구가 장수와 병졸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문(祭文)을 올린다. 이게 그나마 사무친 원한을 풀어줄 수 있을까?

 

한잔 술에 부치어 충정 고하니 寄一奠而敍告
흠향하는 뭇 영혼 어른거리네. 想群饗之
원혼이여 이제 그만 돌아가소서 已矣乎
예로부터 운명 모두 그러했거니. 自古時命之莫不然

 

 

충주가 배출한 작가 권태응 동시집 '감자꽃'

# 감자꽃 노래한 동시작가 권태응 탄생 100주년

권태응은 충주가 배출한 현대 작가다. 그는 1918년 충주읍 칠금리 38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올해가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된다. 그 때문에 권태응문학상이 제정되고, 권태응 문학전집이 11월에 나올 예정이다. 장기적으로는 생가 복원 또는 문학관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권태응은 동시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해방 전에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권태응을 가장 높이 평가한 사람은 아동문학가 이오덕이다. 그는 자연과 농사꾼 아이들을 노래한 단 한 사람의 동요시인으로 권태응을 꼽고 있다. 그리고 권태응이 반백년이 지나도록 묻혀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의 동요를 좀 알려서 우리 역사와 문학을 살피고 교육과 그 밖의 모든 문화를 그 뿌리부터 반성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2001년 한길사에서 나온 연구서 '권태응 동요이야기'에서다.

권태응 시인의 첫 번째 동시집은 '감자꽃'으로 1948년 12월 '글벗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1995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또 다시 '감자꽃'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이 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94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제1부는 '감자꽃'으로 30편이 실려 있다. 제2부는 '춥긴 머 추워'로 28편이 실려 있다. 제3부는 '아기는 무섬쟁이'로 17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제4부는 '공일날'로 19편이 실려 있다.

두 번째 작품집을 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아동문학가 이오덕이다. 그리고 그는 이 작품집을 토대로 권태응 문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했다. 그런 의미에서 '권태응 동요이야기'는 권태응 문학을 학술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저서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언어적인 단순성과 음악성, 진지한 주제의식, 시대정신, 미래를 내다보는 눈 등을 생각할 때 이오덕의 평가는 상당히 객관적이고 정당하다. / 이상기 충북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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