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인 21일 괴산 문광저수지 인근 은행나무길이 ‘황금빛’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장관을 이루고 있다. / 김용수
완연한 가을 날씨를 보인 21일 괴산 문광저수지 인근 은행나무길이 ‘황금빛’ 가을 옷으로 갈아입고 장관을 이루고 있다. / 김용수

지난 금요일에는 울긋불긋 색조화장을 하고 유혹하는 단풍에게 은근슬쩍 넘어가 주는 여유로 문경새재를 찾았다. 고사리 수련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늘어선 은행나무 밑에는 신께서 나뭇잎에 노란색을 다 칠하고도 미완성이라 느꼈던지 물감을 아예 바닥에 쏟아부은 것으로 완성을 이룬 듯했다. 새벽부터 빗방울이 살짝 비치는 흐린 날씨임에도 이곳을 찾은 것은 혹시라도 비가 오고 나면 단풍의 절정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고 3 관문을 향해 오르는 등산로에는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터널을 만들었다. 익어가는 가을만큼 빨리 떠나보내야 하는 짧은 계절에 대한 아쉬움의 눈물 인양 간간히 훌쩍이듯 비가 내리는 듯하였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문경새재의 잘 다져진 흙길은 맨발로 걷기에도 참 좋다. 벗은 신발을 양손에 들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각들이 익숙해져 갈 때는 자연인으로 돌아간 듯 편안했다. 수시로 변하는 날씨의 변덕을 업은 비바람이 낙엽들을 경주시키며 산책로를 가로지른다.

미친 듯이 휘날리며 전력을 다해 굴러가는 낙엽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환호와 탄성을 질렀다. 이어서 들리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잡아두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금 이 계절의 공간에는 어떤 미움도 분노도 원망도 답답함도 허락하지 않는 절정의 불타는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 선한 영향을 주며 따뜻한 마음으로 살고 싶었던 내가 정작 세상의 낮은 가치에 영향을 받고 힘들어했던 시끄러운 속이 달래 졌다. 문경새재에서의 아름다운 가을을 가슴에 안고 돌아오는 길에 지인이 보낸 문자가 들어왔다. 저녁에 문화회관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충주 문화회관에 '소리얼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보러 갔다. 낮 시간에는 눈이 행복했었다면 저녁에는 귀를 즐겁게 해 주는 소리의 선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연주되는 클래식 곡을 관객들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하며 진행하는 지휘자의 음색이 편안해서 더 집중이 되었다.

'역경을 헤치고 승리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공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합동무대였다.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테너 최승원 님의 무대는 열정적이었고 시각 장애를 가진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 님의 무대는 감동적이었다. 안내자의 도움으로 무대 중앙에 서서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그의 숨은 노고를 알아본 관객들의 박수가 뜨거웠다.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연주는 공연장을 뛰어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의 가슴속에서 곱게 물들어가는 단풍들처럼 열정적인 춤을 추었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모든 분들의 무대가 감동이었지만 특히 발달장애를 가진 최준 님의 피아노 연주와 국악까지 곁들인 퓨전 음악은 이색적이었다.

출연자를 소개하던 지휘자가 객석으로 던지는 질문에 자신 있게 바로 답을 알려주던 최준 님의 순수함은 목까지 꽉 채운 단추 하나를 풀어헤친 듯 여유로운 웃음을 주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우리 국악의 판소리를 열창하는 모습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가을이 주는 넉넉함과 장애를 이겨낸 멈추지 않은 열정 때문이리라. 화려한 이력 뒤에 숨은 기교의 소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감동은 장애라는 한계를 극복한 그들이 가을에 주는 또 다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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