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외면. / 클립아트코리아
외면. / 클립아트코리아

친구와 술에 취해 지하철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밤 늦은 시간이었는데 지하철 안은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그날따라 친구는 너무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금방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부축해주는 나도 힘이 달렸다. 우리 앞의 좌석엔 젊은이들이 주욱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졸거나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 청년도 있었다. 나는 그들 중의 누군가가 내 친구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줬음 했다. 그러나 인사불성인 중년남자를 부축하고 있는데도 이삼십 분 흐르는 동안 양보하겠다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술에 취한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자리 양보를 바라는 것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세대에선 버스 같은 데서 자리를 양보하진 않더라도 자는 척을 하거나 창밖을 보거나 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앉았던 예닐곱 명의 젊은이들은 자는 사람 둘을 빼고는 그런 것과도 전혀 관계가 없었다. 우리는 아예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갈등이나 고민 자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 일은 내게 측은지심(惻隱至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측은지심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중 인(仁)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젊은 세대가 여러 악조건과 세계적인 기류로 인해 측은지심마저 소멸된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 본성이 소멸되었거나 인의예지신이 인간 본성이 아니라는 말로 귀결될 것이다. 앞의 말은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며 뒤의 말은 유교의 근간을 뒤흔들어 붕괴시키는 일이기에 유교 자체를 허구로 만들어버리는 말이다.

또 다른 기회에 나는 지하철에서 내 친구 비슷하게 고통스러워하는 어느 중년 남성 앞에 젊은 여자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오래도록 외면을 하다가 한참 후에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그때 나는 젊은 세대들이 나의 세대와 완전히 다르진 않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본성이 소멸된 것도 아니고 인류의 사상 중에 위대한 것 중의 하나인 유교 내지 성리학이 허구도 아니었다. 다만 젊은 세대들에겐 외면이 극적으로 증가되어 있으며 일상화되다시피 해서 측은지심이 퇴화된 듯 한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된 이유들을 살펴본다면 허다한 담론(談論)들이 끌려나올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승자독식 논리와 그에 따른 과도한 경쟁, 더욱이 양극화의 어려움 속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삶에 대한 불안과 공포 같은 것들이며 그것들은 그들이 더욱 피부로 느낄 것이다. 그런 기류를 포함한 복잡다단한 것들이 그들을 움츠릴 대로 움츠리게 해 그런 집단적 사회적 행동으로 굳어져간다고 말을 해도 그 현상에 대한 설명 중 메이저급은 될 것이다.

타인이 어떤 고통에 처하든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젊은 세대만의 세태는 아닐 것이다. 그들을 포함한 현대인들 모두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 말이 타당하다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극단적인 외면의 행태와 그에 깃든 외면의 심리는 현대문명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 심각한 징후라고 볼 수 있다.

인간 본성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인의예지신의 오덕(五德)은 음양오행(陰陽五行)에서의 오행과도 이어지기에 동양의 우주론과 연결된다. 그에 기인한 동양의 위대한 사상 하나가 붕괴된다면 그 또한 새로운 일이지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문제는 그 경계선들을 뒤흔들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책을 섣불리 내놓는 것은 문제만 더 키울 수가 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나고 있는 외면의 심리 내지 그것이 더욱 굳어지고 당연한 듯 되어가는 통시적 변화를 보다 심각하고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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