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진순 수필가

가을 이미지. / 클립아트코리아
가을 이미지. / 클립아트코리아

된서리에 고개숙인 꽃나무들을 바라본다. 한껏 몸태를 자랑하던 정원 일년초들의 생명이 목숨 줄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가을걷이를 하면서 문득 신혼 때 일이 떠오른다. 시어머니께서 서리 맞은 고추, 호박순을 따 들이시며 늦가을엔 하루 벌어 열흘 먹고 산다고 하셨다.

아들이 오형제나 되는 집이었지만 모두 직장으로 학교로 가버리고 여자들 셋만 집안일을 해야 했다. 종갓집 맏며느리이신 어머니는 맏동서와 온 종일 들일을 하셨다, 난 12식구 먹거리를 담당하는 주방 일을 했었다. 들에서 따 들여온 고추잎과 짓고추꺼리, 튀각을 할 중간크기의 고추와 애고추를 분리해서 고추잎은 삶고 애고추는 가루를 묻혀 쪄 널어야 했으며 짓고추는 소금물을 끓여 항아리에 삭혀 둬야 겨울 동치미를 담는다고 일머리를 가르쳐 주셨다.

들일도 많았지만 집에서 차곡차곡 항아리에 담아두고 멍석에 널어 말려야 했던 가을걷이 일은 온종일 동동걸음을 쳐야 했다. 우리 광에는 콩팥 참깨와 들깨, 녹두까지 없는 것이 없을 만큼 풍성 했다. 휴일이면 여자들이 못하는 일을 남자들이 도왔다. 고구마도 캐야하고 겨울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 이를 때 없었다. 감나무 밭이 있었는데 광주리마다 감을 따 침을 담아 놓으면 경운기에 싣고 시장에 갔다 팔아서 겨울 동안 쓸 옷이며 신발 가족들의 생필품을 사오기도 했다.

날이 궂은날은 시어머님은 세 며느리를 거느리고 밑반찬을 담갔다. 껫잎장아찌와 무말랭이 장아찌, 초고추를 담으셨다. 어머님은 별 양념 들이지 않으신거 같은데 솜씨가 좋으셨다. 모든 음식은 간이 맞아야 맛있는 법이라 하셨다. 그중에 한여름 가지를 쪄서 찢어 넣고 열무와 버무린 겉절이 맛은 보리밥과 궁합이 잘 맞았다. 특히 잘 삭혀진 짓고추를 밑에 넣고 골파와 총각 무우를 넣고 소금과 '뉴슈가'로 맛을 내서 땅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누렇게 발효 시킨 짓잎김치는 어머니 솜씨를 흉내 낼 수 없다.

정월 명절이나 제삿날 큰 택에 가면 5섯 동서가 둘러 앉아 큰 양푼에 짓잎 김치만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먹었던 그 맛은 둘이 먹다 하나가 없어져도 모를 만큼 인기가 좋았다. 그 '똑' 쏘면서 사이다 보다 더 시원한 맛은 지금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돈다.

이진순 수필가
이진순 수필가

항상 깔끔하시고 부지런 하셨던 어머니 손은 갈퀴손을 닮았고 칠남매나 두셨던 어머니 마음엔 바람 잘날 없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손색없이 사시다가 맏동서에게 고방 열쇠를 넘겨주셨던 우리 어머니! 맏동서는 어머니 대를 이어 숙명처럼 세월을 품고 사시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생을 마감 하셨다.

올해는 어머니께 전수 받은 짓잎 김치를 꼭 담가서 아이들에게 선보이리라. 이제 내 모습이 어머니를 닮아 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먼 훗날 날 기억하게 할 요리를 난 해 주었든가. 시어머니께선 새벽잠이 없으셨던지 이른 아침 앞마당을 쓰시며 며느리들 잠을 깨우셨다. 그 야속했던 일들이 요즘 난 이해가 된다. 나이가 들어가며 잠이 없다는 것을 알고나니... ... .

난 셋째 며느리로 살림을 나 아내와 어미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사업도 해 보았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마당에 서리 맞아 고개 숙인 꽃나무들과 조롱조롱 매달린 울타리 콩 사이로 까마중이 까맣게 익어 있다. 한줌 따 입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쪽빛 하늘과 오색의 단풍 사이로 국향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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