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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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신분에 따라 하는 일이 달랐다.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일에 대한 귀천은 사라졌고 노동은 신성한 것으로 진화되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거기에는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개인의 경제적인 만족과 보람, 각자의 선호적 가치에 부합하면 그만이다.

성서적으로 보면 노동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대가로 '수고', 즉 노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징벌의 대가가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중요한 직업윤리인 '소명(calling)의식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소명이라는 의미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그의 직업이 교사라고 한다면 By calling, he is a teacher라고 한다. 여기서 By calling은 '부름에 따라' 혹은 '부름에 의해'서란 의미다. '소명'이 결과적으로 '직업에 따라'로 치환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름은 신에 의한 부름이며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소명의식은 개신교의 '칼빈주의'와 맞닿아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은 구원 예정론이다. 예정론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구원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신외에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구원에 대한 믿음은 '자기 확신(self-conviction)'에 기댈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성직자들이 설교 할 때마다 '믿습니까'나 '믿으시면 아멘으로 응답'할 것을 강권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범죄의 징벌인 노동도 마찬가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징벌의 대가에 대해 누구도 경중을 따지기 어렵다. 신에게서 주어진 징벌이기 때문에 순종하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런 생각이 바로 소명의식으로 발전한 셈이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에 대한 소명이나 천직의식을 따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 더 중요한 문제는 노동을 보는 가치관의 문제다. 천직의식이든 소명의식이든 이런 의식들은 개인의 가치관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기 때문이다. 한 가지 사례를 보자. 일본의 제빵사 와다나베 이타루의 이야기다.

그는 막연히 농부를 꿈꾸다가 서른이 넘어 겨우 농산물 유통회사에 취직을 한다. 벅찼던 기쁨도 잠시, 원산지 허위 표기와 뒷돈 거래를 일삼는 회사에 회의를 느낀다. 천연균을 연구했던 할아버지, 마르크스에 탐닉했던 아버지를 보면서 그는 '작아도 진정한 자기 일'을 하고 싶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시골에 작은 빵집을 내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와다나베 이타루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건강에 좋다는 천연균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그의 끈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나아가는 그의 의식과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한병선 문학박사·교육평론가

사례는 또 있다. 세계적인 영성가로 잘 알려진 안젤름 그륀 신부 이야기다. 280명의 직원들을 거느린 재정담당 책임신부로 일한 28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온 사례다. 그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를 지배해오던 가치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자기결정권, 자유와 책임 등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정의, 용기, 중용, 지혜와 같은 고전적인 가치들이 여전히 중요하며, 이런 가치는 오늘날 휴머니즘을 더욱 촉진시킨다고 강조한다.

결국 일이 되었든, 노동이 되었든, 가치란 자신의 삶을 위한 원천이 된다는 것,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직업적 소명의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 잘 만나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금수저들이나, 평생을 수고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확보한 경우는 예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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