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이 머물다 간 그곳, 고즈넉한 풍광은 한폭의 그림
신선이 머물다 간 그곳, 고즈넉한 풍광은 한폭의 그림
  • 중부매일
  • 승인 2018.11.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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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래강 리포트] 20. 못 다한 이야기
선유동, 기이한 수석에 매료…조선말 8경서 9곡으로 설정
선인들 멋 깃든 정자 애한정…요도천, 이성계가 건넌 하천
청천선유동.
청천선유동.

# 글에 늘 아쉬움이 남는 이유

글을 쓰다 보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글 자체의 부족함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또 꼭 써야할 내용을 쓰지 못한 자책 때문이기도 하다. 글의 부족함은 하루아침에 극복되는 것이 아니니 할 수 없지만, 중요한 내용을 빠트린 것은 잘못이고 실수이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에서도 몇 군데 빠트린 곳이 있다. 대표적인 곳이 청천 선유동이다. 선유동은 화양동과 함께 화양천의 쌍벽을 이루는 절경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괴강가에 있는 애한정과 화암서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괴강삼거리에 있는 농업역사박물관은 이야기하고,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정자와 서원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애한정은 조선중기 이후 괴산과 충주를 찾은 시인묵객들이 꼭 들러 시를 남긴 대표적인 정자이기 때문이다. 화암서원은 광해군 때인 1622년 창건된 괴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세 번째로 달천과 달래강을 이야기하면서 지류를 완벽하게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것은 지류가 너무 많고 또 현장답사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연유로 지류를 다 다루지 못했지만, 달래강의 최하류에 있는 요도천 스토리를 다루지 못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다. 그것은 요도천에 아주 특별한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세 군데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다루고자 한다.


# 청천 송면의 선유동 이야기

입구 왼쪽 선유동문.
기국암구암 은선암.

청천 선유동은 화양동 상류에 있다. 신선이 놀만한 곳이라 해서 선유동이라 이름 했다. 선유동은 수석(水石)이 기이하고 경치가 빼어나 경승으로 꼽힌다. 조선 중기 선유팔경으로 불리다, 조선 후기 구곡이 설정되면서 선유구곡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하류의 제1곡 선유동문(仙遊洞門)에서부터 상류의 제9곡 은선암(隱仙巖)에 이르기까지 선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상류쪽 기국암(棋局巖: 제7곡), 구암(龜巖: 제8곡), 은선암이 한 데 어우러진 풍경이 절경이다.

제1곡 선유동문은 선유구곡으로 들어가는 입구 왼쪽에 있다. 30m 정도 되는 바위 아래로 굴이 있고, 바위 윗부분에 선유동문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선유동문 건너편으로는 하늘로 우뚝 솟은 바위산이 있다. 바위의 형상이 마치 하늘을 떠받드는 것 같아 경천벽(擎天壁: 제2곡)이라 이름 붙였다. 제3곡은 경천벽 상류에 있는 학소대(鶴巢臺)다. 학이 둥지를 틀만한 바위다.

제4곡 연단로(鍊丹爐)는 선유1교에서 보이는 큰 바위다. 평평한 바위 위가 움푹 패여 있어, 금단(金丹)을 만드는 화로 같아서 연단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단은 신선이 먹는 불노장생의 신약이다. 제5곡 와룡폭(臥龍瀑)은 용이 누워 놀만한 폭포라는 뜻이다. 물이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며 폭포를 이루고 그 아래 못을 형성해 용이 머물만 하다. 6곡 난가대(爛柯臺)에서 9곡 은선암은 이웃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난가대는 기국암과 한 쌍을 이룬다. 기국암에서는 바둑을 두고, 난가대에서는 이들 대국을 관전했기 때문이다. 기국암은 바둑판 바위고, 난가대는 신선들의 바둑을 지켜보던 사람이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서 있던 곳을 말한다.

구암은 말 그대로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다. 거북이 머리를 하늘로 쳐든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목 아래 부분에는 비늘 형태의 귀갑(龜甲)이 분명하게 보인다. 바위 중간에 구암이라는 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은선암에도 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기국암과 구암에 비해 우뚝 솟아 있다. 은선암 뒤쪽에는 관찰사 조명정(趙明鼎)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 괴강 다리 건너 만나는 애한정과 화암서원

화암서원.

괴산읍에서 괴강교를 건너면 감물면과 칠성면으로 나뉘는 삼거리다. 그곳에 괴산농업역사박물관이 있다. 농업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강쪽으로 가다보면 박상진(朴商鎭)효자문을 만날 수 있다. 박상진은 함양박씨로 효를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박상진의 9대조가 박지겸(朴知謙: 1549-1623)으로 이곳 괴강가에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서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박지겸은 '애한정기'에서 애한정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야기하고 애한정이라 이름 지은 연유를 설명했다. 그는 애한정에서 독서하고 후학을 가르치면서, 여가를 이용해 가야금도 켜고 바둑도 두고 시조도 짓고 낚시도 하는 즐거움을 누렸다고 한다. 이곳 애한정에 흔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월사 이정구(李廷龜), 우암 송시열, 직재 이기홍(李箕洪, 장암 정호(鄭澔) 등이 있다.

이정구의 애한정 팔영(八詠) 시가 당시의 풍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여섯 번째 노래 '강 포구에 떠 있는 상선(江浦商船)'에서 그는 정자를 찾는 손님과 술잔을 나누며 괴강 포구에 떠 있는 상선에게 한양의 소식을 묻는다.



포구에 때때로 점점이 뜬 배들이 보이더니 (浦口時看點點)
안개 걷히자 노 젓는 소리 속에 말소리 들리누나. (霧開人語櫓聲中)
배를 불러 대궐 소식을 묻고자 하는 것은 (呼船欲問東華信)
이 앞강이 바로 한수와 통하기 때문일세. (爲是前江與漢通)




애한정이 행정구역상 괴산읍 검승리에 있다면, 화암서원(花巖書院)은 칠성면 송동리에 있다. 화암서원은 1622년(광해군 14) 이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 이문건(李文楗), 노수신(盧守愼), 김제갑(金悌甲), 유근(柳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그 후 허후(許), 전유형(全有亨), 박세무(朴世茂), 이신의(李愼儀), 박지겸(朴知謙), 허조가 추가 배향되었다. 화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훼철되었다가 1956년 박동찬(朴東燦)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 배극렴(裵克廉)을 찾아 요도천을 건넌 이성계 이야기

요도천.
요도천.

요도천(堯渡川)은 임금이 건넌 하천이다. 그것은 임금요자, 건널도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요도천을 건넌 임금이 누굴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다. 정확히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배극렴을 정치에 끌어들이기 위해 이곳 충주의 어래산(御來山: 394m)을 찾아온 것이다. 어래산은 현재 충주시 주덕읍과 괴산군 불정면을 경계 짓는 산이다. 어래산은 이름 그대로 임금이 온 산이다.

왕이 되기 전 이성계는 왜구 토벌과 여진족 토벌을 통해 세력기반을 다졌다. 배극렴은 1380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천년(李千年: 외조부), 이인임(李仁任: 외종육촌), 조민수(曺敏修) 등 고려시대 권문세도가와 인척관계 때문에 잠시 이성계의 휘하를 떠나 충주 어래산에 은거한다. 배극렴의 도움이 필요했던 이성계는 어래산을 세 번이나 찾게 된다. 그래서 어래산 아래 주덕읍과 불정면에는 삼방리(三訪里)라는 마을이 있다.

이성계의 삼고초려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배극렴은 개경으로 올라간다. 1388년 고려의 요동정벌 때 배극렴은 우군도통사(右軍都統師)인 이성계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참전한다. 그리고 위화도회군에 동참해 친원파인 최영 중심의 구세력을 추방하는데 앞장선다. 1392년 7월 조선이 개국할 때 그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한다. 이어서 그는 조선 초대 영의정이 되었고 그해 12월 세상을 떠난다. 그의 묘는 어래산에서 멀지 않은 증평군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에 있다. <끝> / 이상기 충북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심고을연구원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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