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오송역은 누가지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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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준 기자
  • 승인 2018.11.11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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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KTX오송역 전경 /중부매일DB
KTX오송역 전경 /중부매일DB

[중부매일 메아리 박상준] 한반도에 철도가 개통된 것은 꼭 113년 전이다. 1905년 일제가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수탈을 지원하기 위해 부설한 경부선철도 전구간이 개통됐다. 1869년 미국 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에서 네브라스카주 오마하까지 2천826㎞의 대륙횡단철도가 개통 된지 36년 만에 이 땅에도 철도시대가 열렸다. 도로환경이 열악하고 항공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도시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교통인프라에 따라 도시의 성장속도도 달라졌다. 수원, 천안, 대전, 대구의 눈부신 발전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에 힘입은바가 크다.

반면 충북은 철도교통의 사각지대였다. 대전-청주-충주-제천-단양을 잇는 충북선이 있지만 충북의 대중교통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낮았다. 만약 경부선 철도노선에 청주가 포함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청주는 대전만큼 도시규모가 커졌을지도 모른다. 이런 아쉬움이 드는 것은 당시 일제의 경부선 철도노선에 청주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유림(儒林)들은 철도를 깔면 지맥(地脈)이 끊긴다며 거세게 반대했다고 한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암흑의 시대에 선비들은 철도교통이 가져올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한때 철도교통은 한물간 교통수단이었다. 마이카시대 고속도로에 치이고 항공수요에 밀렸다. 그러나 2004년 시속 300㎞의 고속전철이 도입된 이후 비행기 못지않게 빠른 녹색교통이라는 이미지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30년 전 호남고속철도 분기역 유치에 지역인사들이 비장한 각오로 나선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80여년전의 선택이 지역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절감했다. 일종의 학습효과였다. 노태우정부 시절인 1990년 지역 인사들이 분기역을 유치하기 위한 과정은 눈물겹도록 치열했다. 당시 행정기관의 무관심속에 오송분기역 유치운동이 범도민운동으로 승화되면서 '충북인의 힘'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故 이상록 유치위원장이 기자에게 전한 당시의 유치 비화(秘話)는 '설마'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절박한 도민정서를 반영한다. 도민의 여론과 역량이 집중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가 중요하다. 도민의 집요한 요구에 노 대통령은 청남대로 임인택 건교부장관을 불러 오송분기역 지정을 지시했다.

이후 2010년 개통한 오송역은 세종시 후광효과와 분기역이라는 이점 때문에 해마다 승객이 가파르게 늘면서 상반기에만 269만 1000명을 기록해 올 이용객이 500만 명을 돌파할 전망이다. 고속전철은 국토의 공간적인 거리를 좁혔다. 환경친화성, 안전성, 대량수송력, 효율성 등 장점 때문에 철도르네상스라는 말까지 나왔다. 고속전철역이 활기를 띠면 도시발전에 기여한다.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최근 오송역이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세종역 신설, 일부 호남권 국회의원들의 호남선 직선화 요구 그리고 지지부진한 오송역세권 개발등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와중에 충북도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갈피를 못잡고 있고 청주시는 소극적이다. 이럴때 일수록 '오송분기역'을 유치할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민이 힘을 모으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KTX오송역은 무력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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