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일요일
11월의 일요일
  • 중부매일
  • 승인 2018.11.1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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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조영의 수필가
시제. / 클립아트코리아
시제. / 클립아트코리아

닫혔던 사당 문 여는 소리가 고요한 산을 깨웠다. 며칠째 미세먼지가 높아서 공기는 좋지 않지만 서로서로 인사 나누는 마음은 반갑고 쾌청하다. 바람도 부드럽다. 새는 나뭇가지에서 오래 머물고 아이들에게는 야트막한 능선이 잔디썰매장이 되었다.

오늘은 평강 채 씨 공조판서공 월촌 종중 시제時祭 날이다. 한동안 참석하지 않은 나는 분위기가 낯설다. 아는 사람이 빨리 왔으면 싶어 입구 쪽으로만 눈길이 간다. 올해부터는 시제 음식은 물론 상차림까지 전문가에게 맡겨 여자들은 할 일이 없다. 삼삼오오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다가 연세 드신 분들 중심으로 자리가 커졌다. 그분들은 젊은 며느리들이 오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당신들은 며칠씩 걸려 시제 음식을 마련하느라 고생하면서도 불평이 없었는데 요즘은 일거리가 없는데도 오지 않는다며 쉬는 한숨이 깊다. 나도 가끔 의무처럼 참석하는지라 자리가 가시방석이 되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남은 반가운 인사가 되기도 한다. 못 만난 시간 동안 겪은 일이며 식구들 안부로 시간이 짧다. 어깨가 땅에 닿을 듯 고부라진 대고모님은 시댁도 같은 마을이다. 돌아가신 분이며 친척들 일을 모두 알고 있다. 생김새, 성격, 집의 구조와 형제들, 유별난 일화까지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시제에서만 느끼는 정겨움이다. 기억이 희미하여 손가락을 짚어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끊어진 기억을 되물으며 서열을 정리하는 일도 대고모님의 일이다. 나이로 보면 딸처럼 어리지만 항렬로는 형님이다.

"촌수가 우선이지. 나이가 어려도 형님이라 불러"

대고모님과 눈이 마주치자 "형님"이라 부르고 형님이 된 새댁은 얼굴이 붉어졌다.

"자네는 언니가 아니라 아주머니라 불러야 햐."

꾸지람도 싫지 않다. 촌수를 찾고 돌림자로 이름을 부르다 보니 처음에 어색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웃음이 터진다.

한바탕 웃음이 사라질 무렵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제에 온 이유가 나는 따로 있다. 제를 지내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제 전에 홀기를 구하여 읽어보았는데 우리는 퇴계 이황이 작성한 홀기와 같다고 한다. 행 참신례, 전폐례, 초헌례, 아헌례, 삼(종)헌례, 유식례, 망예례로 진행되는데 그 진행에서 불리는 말도 어렵다. 대축, 폐백, 알자… 뜻을 찾아가며 읽은 홀기는 '다시 신위전에 들어가 철찬 합문하고 퇴청하시오'로 끝을 맺는다.

이어 선묘 앞에서 다시 제를 올리는데 모두 끝나기까지 한나절이 걸린다. 지루하고 춥고 재미없어서인지 오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 그래서 참석하는 모두에게 약간의 교통비를 주는데도 효과는 미비하다. 이유를 젊은 아들에게 물었다.

첫 번째는 오래 걸리는 시간을 꼽았다. 제가 진행되는 동안 사당 마당에서 벌 받듯 서 있어야 하고, 이어 선묘로 가는데 한 분 한 분 행하는 절차 또한 같은 일의 연속이라 힘겹다. 또 먼 거리, 일요일의 교통체증, 종교, 휴식과 여가생활, 이기주의로 시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젊은이에게 시제는 현실 뒤에 있고, 전통을 이어가고 싶은 남편은 시제가 우선이다. 서로의 낯빛과 마음이 겹치는 동안 내가 찾은 것은 행동이다. 서둘러 선산으로 왔다.

사당 안은 제례가 진행 중이다. 안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문밖에서 보니 일부만 보이고 사당 안은 보이지 않는다. 육개장 끓는 구수한 냄새만 추운 몸을 자극한다. 한참을 사당 문 앞에서 기웃거리는 내가 거슬렀는지 할머니 한 분이 내 옷을 잡아끈다.

남녀가 평등하고 남녀 일을 구분하지 않는 요즈음이지만 시제에서 여자는 평등하지 않다. 다시 여자들 속으로 왔다. 시제에서 빠지지 않는 종 할머니 얘기는 알고 있어도 흥미롭고 들을 때마다 따뜻하다. 시조이신 할아버지는 사육신 성삼문의 외가다. 역모죄로 모두 죽게 되자 종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업고 지금의 진천 땅으로 도망 온다. 그리고 신분을 속여 키운다. 세월이 흘러 역모의 누명을 벗고 신분이 회복되기까지 곁에서 보살펴준 종 할머니 헌신을, 후손들은 매년 시제를 지내면서 은공을 기억한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종 할머니는 돌아가셔도 종이 되었지만 우리는 종 할머니가 가장 고맙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인기 있는 분이기도 하다. 다른 분들의 묘는 제만 지내고 돌아서는데 종 할머니 비석 앞에서는 이야기가 많다. 종 할머니는후손에게 가장 빛나는 종踪이 되었다.

11월의 일요일, 바쁘다는 일의 개념과 인간의 근원과 뿌리의 소중함을 찾는 시제時祭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물어보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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