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뮤지컬 배우 민우혁이 12일 잠실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SK-두산 6차전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2018.11.12 / 연합뉴스
뮤지컬 배우 민우혁이 12일 잠실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SK-두산 6차전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2018.11.12 / 연합뉴스

SK와이번스와 두산베어스가 맞붙은 2018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는 결국 4승2패, SK와이번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 6차전이 열리던 지난 12일 저녁, 하늘을 찌를 듯하던 양측 응원단의 함성이 일시에 멎고 고즈넉해진 가운데, 그도 한 때 프로야구 선수였다는 뮤지컬 배우 민우혁이 부르는 애국가 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입안으로 따라 부르노라니 문득 콧등이 시큰해진다.'뭐지? 뜬금없는 이 감정의 정체는'. 나는 언제부터인가 애국가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불안하고 편치 못한 마음이 되곤 한다. 애국가의 비극 때문이다. 옛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속울음 울며 숨죽여 부르던 노래임이 떠오르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노랫말을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채 불리고 있으면서 한편에선 폐기론까지 제기되고 있는 처지가 너무 안타까운 까닭이기도 하다.

모두 4절과 후렴으로 구성된 애국가 가사는 내가 아는 한 다른 어느 나라의 국가보다도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여 영원하라'는 노랫말 자체가 1812년 영.미전쟁이 한창이던 맥헨리 요새를 배경으로 지어진 것인 만큼 전투적이며, 인종차별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어 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는 그들의 전승 민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천황의 치세가 영원하기를 비는 봉건적 천황 찬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양심적인 지식인들로부터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의 악몽을 일깨운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티엔한(田漢)이 작사한 중국 국가 '의용군행진곡'은 이들에 비해 사뭇 호전적이고 섬뜩한 노랫말로 되어 있다. 예를 보이면 "노예 되기 싫은 사람들아/우리의 피와 살로/우리의 새 장성을 쌓자"와 같은 것이다. 이것들에 비하면 갖가지 자연물들에 가탁하여 민족의 꿈과 염원과 다짐을 그려 보인 애국가의 가사는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수많은 외침에 맞서 싸워 나라의 국가라기엔 의외라 할 만큼 평화 애호적이며, 전투적, 혁명적, 배타성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얼핏 국가주의의 기미가 엿보이지만 그것은 국가(國歌)이기에 자연스러운 필연일 뿐이다.

이런 애국가가 지금까지 그 가사를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세간에 윤치호설과 안창호설이 유력하게 제기되어 있지만 논거에 취약하다. 안창호와 윤치호 생전에 이미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논의가 제기돼 있었지만 정작 본인들조차도 긍·부정의 확실한 언질을 유보해 의문을 해소시켜 주지 못했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월간 '기독교사상'에 연재중인 '씨 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의 글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와 윤치호'를 통해 아주 유력한 심증을 얻을 수 있었다. 연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논지는 대략 이렇게 이해된다. 애국가 작사 당시 이 땅의 지식인 사회는 심각한 배타적 지역감정에 매몰돼 있었다. 크게 기호파와 서북파의 대립이 그것이다. 안창호가 민족이 함께 부를 애국가 가사를 지었지만 그것이 서북출신 안창호의 작인 것이 알려지면 기호파가 즐겨 부를 리가 없다. 그래서 안창호는 서로 친밀한 관계이던 기호 출신 윤치호와 상의해 그가 작사한 것처럼 했다는 것. 그랬다. 당시 지식인 사회의 대립과 반목이 그토록 심각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고 해외에 망명한 독립운동가 사회에서도 그랬다. 상해시절 이를 가슴아파한 안창호는 스스로 백의종군을 솔선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이런 사정 속에 애국가를 서북인들은 안창호가 지은 것인 줄 알고 부르고, 기호인들은 윤치호가 지은 줄 알고 불러 온 것이다. 어찌'애국가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비극은 해방 뒤에도 계속된다.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리면서 국가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예측한 윤치호가 측근들에게 애국가를 자기가 지었다고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증언들이 여럿 확인된다. 그가 예측한 대로 해방 후 '친일파 윤치호'가 지은 애국가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애국가가 아직 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은 것은 그나마 작사자가 확정되지 않은 덕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애국가의 비극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곡을 붙인 안익태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까지 더해지면서, 이참에 아예 애국가를 폐기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새로운 국가로 삼자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는 상황이다. '친북'에는 바다처럼 관대하면서도 '친일'에는 유독 '절대 무관용'의 태도를 보이는 현 집권세력이 소망하는 대로 '진보정권 20년'의 꿈이 실현된다면 애국가 대신 황석영의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임화의 '인민항쟁가'가 국가로 지정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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