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외면. / 클립아트코리아
외면. / 클립아트코리아

지난번 칼럼에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를 거의 하지 않는 일에 대해 썼다. <외면의 심리>라는 제목으로 그렇게 된 사회 정황을 문명사적인 차원까지도 언급했고 그 심각성에 대한 우려와 함께 문제제기를 했다.

공감을 제법 받았다. 우리의 삶에서 그런 일은 으레 일어나고 있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 같다. 외면하는 청년들이 내면에선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들을 안쓰러워하는 마음이 듬뿍 얹힌 글이었다. 청년들이 그처럼 외면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외면하는 것이라는 날카로운 말도 있었다. 그런 비극으로 더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도 외면의 극단화는 해결해야할 문제로 여겨졌다.

이색적인 답글들도 있었다. 공동체가 사이버로 옮겨가서 그렇다는 글도 그 중 하나이다. 신선했다. 과연 이 시대에 만연된 외면의 심리는 사이버와도 관계가 깊다. 청년들이 SNS 때문에 더 개인주의적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인간 관계가 껄끄럽고 불편해서 온라인으로 이동하는 경우 등 복잡한 양상들이 있을테지만 그 글은 타당성이 커 보였다.

오프라인 공동체에서 온라인 공동체로 옮겨갔다고 해서 그 주체들의 가슴 속 허전함이 사라질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색채는 다를지라도 여전할 것 같다, 그런 일은 자연스러운 동시에 당연할 것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든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온라인 공동체는 얼굴을 맞대는 face to face 관계가 아니다. 서로 만나지 않고 이미지와 언어로만 소통한다. 우리에게 또다른 시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오프라인에선 하기 어려운 차원들을 열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그늘이 있는 것이다. 온라인에선 얼굴을 맞대야만 느낄 수 있는 정서까진 이르기 어렵고 피상성에 그치거나 적당한 공감에 머무는 성향이 크다. 온라인 공동체에서의 사람 관계가 유리 같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표현엔 그런 면이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외면의 극단화는 그러기에 온라인 공동체로 이전했다고 해도 깊은 치유까진 되지 못할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오프라인 공동체의 소중함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인류의 길인 것이다.

자발적 불편 운동이 떠올랐다는 말도 있다. 그에 대해 알지 못했던 나는 찾아 보았다. 조금씩 양보하면서 불편을 감수하며 살면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이웃과 약자를 위한 운동이라고 되어 있다. 따스하게 와닿았다. 편리 위주로 살아가게끔 되어 있는 우리 사회 내지 문명은 주는 것이 많은 반면에 상실시키고 있는 것 또한 많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외면의 극단화는 편리 위주의 심리와도 통할 것이다. 타인을 위한 자발적 불편이 자신의 내면을 얼마나 풍성하게 하는지, 고독 또한 얼마나 건강하고 기름지게 하는지는 체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지금 사라져가는 세대에 그런 가치를 가지고 온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주름살 투성이의 노인들 중엔 그 가슴에 자신을 희생시켜 가족과 이웃을 위해 온돌이 되고자 한 숭고함이 제법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이 문명의 그릇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면의 극단화로 치닫는 사람들에 의해 외면을 당하는 서러운 구조가 우리가 사는 사회와 문명의 구조이기도 하다. 물론 외면의 극단화는 지난번의 컬럼에서도 썼듯 젊은 세대만의 행동이 아니다. 기성 세대에도 농후하기에 보편적인 성향을 띤다. 외면의 극단화는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우리 모두가 그에 갇힌 바 되었다. 기막힌 역설이다. 그러한 외면의 극단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외면이 필연이며 그것은 결국 내면의 붕괴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슬프게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내면으로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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