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발굴 뒷얘기-66.주암댐 수몰지역 조사 (2)

② 곡천유적

어떻게든 연장조사를 실시해야만 했으나, 조사를 주관한 전남대학교 박물관은 문제 해결에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추가발굴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1차 조사에 참여하였던 대원들을 모아 놓고 발굴의 필요성과 예산준비의 어려움을 실토하자 조사대원들 모두가 다시 발굴에 들어가자고 하는 의견과 함께 무보수로 참가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필자는 박물관과 학교당국에 여러 차례 협의하여 보았으나 어떠한 대책도 끌어낼 수 없었다.

결국 아내에게 발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를 부탁하는 최후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어떻게든 20여 일간의 발굴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여 보아도 추운 겨울 2차 조사에 참가하였던 여러 대원과 학생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하였던 당시 아주머니와 최정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이렇듯 열악한 상황에서 발굴을 진행하는 동안 당시 학예부장 이석린교수(사학과, 전 박물관장)의 위로방문을 맞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얼어붙은 논흙에서 깨진 면이 있는 석영석기 조각을 찾아서 이를 날로 불에 녹인 결과, 석기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곳에 구석기 문화가 있다는 새로운 확신을 갖게 하였고 여기에 대한 궁금증은 더하게 되었다.

한편 1호 고인돌 주변으로 확대발굴하면서 약간의 땅파임 자국이 있는 것을 찾게 된 것은 당시까지 20여년 필자와 같이 발굴한 석장리의 김희환, 김종근님들의 경험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그 홈자국은 모죽임(抹角) 네모꼴 집터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집터의 안전을 위해서 버팀 기둥을 세워 놓는 흔적까지도 찾는 쾌거를 올렸다.

이것은 서양의 큰 돌 문화에서는 일찍이 밝혀진 사실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영암 장천리유적(목포대학교 박물관팀 발굴)에서만 확인되었고 주암댐 수몰지역의 어느 조사팀도 찾지 못한 것이었기에 우리 조사단으로써는 사뭇 뿌듯한 발굴성과였다.

이 집터의 발굴에 이어서 송광천 방향으로 약 30m 떨어진 부근에서 여러 점의 진흙빚음과 불탄 흙덩어리 등을 찾게 되어 이 부근이 가마터일 것으로 생각하고 발굴을 하였으나, 지표에서 가까운 관계로 이미 유적이 파괴되어 흔적만을 발견하는 성과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주암댐 수몰지역에서 처음 찾은 청동기 시대의 가마터라는 점이 중요했고 이에 고(故) 이희수교수(당시 연세대학교 요업공학과)를 신숙정박사가 어렵사리 모시고 온 것에 대하여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렇듯 2차 조사를 통하여 찾아진 집터 2개를 포함, 모두 3개의 집터를 확인한 셈이 되어 고인돌 ? 가마터 유구 등 다양한 성격의 유구들이 모여 있음에 고무된 조사단은 적극적으로 주암댐 수몰지역 조사단 단장 김희수교수에게 연락을 취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굴을 진행해본 경험이 없는 국어교육학 전공 교수로서는 어떤 대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였다. 결국 이 유적 조사의 발굴성과로 해서 연장 발굴 문제가 조사단의 지도위원들께 보고되고 이로부터 연장 조사를 할 수 있게 된 계기를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과정상의 어려움은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다른 기억을 더듬어 보면, 발굴예산이 부족한 상황에서 외식을 하지 못하고 매일 먹던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떠오른다. 애초에 준비해서 간 김장김치는 금방 동이 나 버려 가끔 들른 곡천식당의 뚱뚱한 아주머니로부터 배추김치와 갓김치를 넉넉히 얻어먹었던 기억과 냉동된 은어를 우리대원들이 몰래 꺼내 돈을 지불하지 않고 먹었던 좋지 못한 추억도(물론 나중에 일부러 가서 음식을 시켜 먹으며 고백하였다고는 하나) 지금 생각하면 모두 웃음으로 넘기게 된 것은 1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탓일까? 연구실에 있는 학생과 함께 너털웃음 짓는 걸 보면 필자도 나이를 먹어 가는 모양이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 이융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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