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들국화. / 클립아트코리아
들국화. / 클립아트코리아

들국화는 청초하다. 산의 초입이나 들녘 비탈길에 들국이 없으면 얼마나 황량할까. 산야에 피어 있는 들국화로 가을이 더 낭만적인지도 모른다. 해맑은 하늘을 그대로 닮은 듯한 모습으로 지천에 피어있는 들국화. 치마저고리를 입은 산골 처녀의 모습처럼 소탈하면서도 청순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마음까지 편안해지곤 한다. 가을이 되면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고 밑동이 어디론가 쏠려서 피어 있는 꽃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 잔디 위에서 뛰어 놀던 기억의 언저리에는 산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동그란 봉분 위에서 누가 먼저 뛰어 내리나 내기를 하던 뒷동산자락에 지금 생각해 보면 들국화가 무성하게 피어 있었던 것 같다.

진달래나 코스모스는 꺾어다 꽃병에 꽂아 놓았지만 들국은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던 듯 싶은데, 요즘 들어 관심이 가고 눈길이 가는 것은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맑고 어여쁜 들국화가 피고 지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인생과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슬을 머금고 동글동글 매달려 있는 봉오리들은 이제 막 세수를 끝낸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상큼하다. 새벽에 일어나 이슬이 맺힌 꽃을 보면 그 상큼함에 정신이 맑아지며 향기로워지기까지 한다.

가꾸고 돌보아 주는 이가 없어도 밭둑이나 야산 언저리에서 피고 지는 모습은 사십이 넘은 여인의 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열적이고 화려한 시절은 갓 지나고 이제 완숙한 모습으로 제 삶을 사는 사오십 대.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삶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이 절로 배어나는 어머니 세대 여인의 모습이다.

야트막한 산언저리나 바위틈, 들녘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들꽃 속에 국화는 항상 모습을 드러낸다. 쑥부쟁이, 산국, 감국, 구절초, 미역취, 참취꽃 등 산야 어디에 무성하니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가을이 오감을 자극하며 더욱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국화 때문이리라.

노드롭 프라이가 자연의 사계 신화중 가을의 미토스를 비극으로 표현했듯이 들국화는 가을의 끝과 겨울의 초입 사이에 주로 핀다. 꽃이 피고 녹음이 깃들며 아름답게 치장한 계절에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진 뒤, 겨울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꽃을 피우는 들국화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곧 이별을 해야 하는 여인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느지막이 산야에 쓸쓸히 피어 서리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 사람으로 치면 인생의 갈무리를 한다고나 할까.

꽃 피고 난 뒤 열매를 맺어 바람을 기다리는 다른 꽃들과는 달리 미처 꽃봉오리를 열지도 못한 채 서리를 맞는 것을 보면 미래의 내 모습인 양 가슴이 떨려온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고함까지 갖추고 은은한 향취를 내며 피지는 못할지라도, 산속 후미진 곳 어느 곳이든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저 혼자 피었다 지는 것까지도 못한 채 꽃봉오리로 겨울을 맞는다면, 그리하여 국화꽃 저 버린 겨울 뜨락에 봉오리채 마른 국화가 내 노후의 모습이라면…….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가을이 다 가는 것도 모르고 국화꽃 향기에 취해 있다가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해지면 선뜻 정신을 차리게 된다. 서리 맞은 꽃봉오리가 되지 않으려면 꽃이 피고 나서야 가을을 느끼기보다 여름부터 미리 가을을 준비하고 겨울을 생각할 테다. 겨울의 내 뜨락에 들국화가 활짝 피어 있어서 보는 이에게 미소가 지어지게 하고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 준다면 무엇을 더 바랄까. 들국화 만개한 삶이 욕심이라면 그 비슷한 향취라도 풍겼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