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전 목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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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韓圭卨). 누구나 알 법한 인물이지만 사실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완용(李完用)이라면 다르다. 이 나라 국민이라면 삼척동자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할 만큼 잘 알려져 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구는 도의회 의원 선거에 나섰다가 운동 한 번 제대로 못해 보고 낙선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의 얘기가 들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름에는 언제나 '매국노', '친일파', '을사오적'등의 용어가 따라붙기도 한다.

친일파 매국노의 상징이 돼 버린 그도 본래는 반일 성향의 온건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독립신문' 1897년 11월 11일자에는 '대한의 몇 째 아니 가는 재상'이라고 극찬한 내용이 보일 정도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는 것에 반대했다"는 이유였다. 그가 한 때 독립협회 회장직을 맡고 만민공동회를 이끈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08년에는 역대 왕들로부터 간신 또는 불충의 죄를 썼던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신원하고 시호를 내리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지원, 정약용, 남이 장군 등도 그 덕을 보았다. 일본보다는 미국이나 러시아에 더 많이 기울어 있던 그가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을사늑약'체결을 주도한 1905년을 전후한 무렵부터이다. 시류에 민감한 천성 탓이겠지만, 그를 일찌감치 누구보다 '쓸모 있는 얼간이'라고 판단한 일제의 회유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일제의 위세가 당당해짐에 따라 그의 친일 행보도 거침이 없었다.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등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행적을 짐작할 만하다. 그 대가로 그가 욕망한 모든 것을 얻고 천수를 누렸으나 죽어서는 무덤 하나를 지니지 못한 채 명예롭지 못한 이름만 남아 대대손손 욕을 보고 있으니 딱하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한규설은 같은 시대 같은 궁궐 안에서 같은 임금을 섬기는 선비였지만 이완용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참정대신이던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회의가 열리는 중명전 안팎을 에워싼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온갖 말로 회유하고 협박했다. 저들의 언사는 불량하고 태도는 방자했다. 그러나 한규설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토가 "동양의 대세가 그렇게 되었으니 보호조약에 동의하는 도장을 찍으시오."하자 한규설은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라고 응수했다.

3살짜리 외아들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외무대신 박제순을 다독이고, "이일을 어쩌면 좋겠느냐?"며 흔들리는 고종에게 "한결같이 거절하되 군신이 같이 순직할 결심을 가져야 됩니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내보이기도 했다. 이완용이 조문 수정을 전제로 찬성할 것을 제의하자 "절대 부당하다. 칙명이라도 복종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맞서기도 했다. 결국 이토는 그를 중명전 골방에 가둔 채 일을 저질렀다. 고종 앞에서"도장을 생명과 교환할 결심을 하였노라"던 외무대신 박제순이 끝내 도장을 내주고 만 것이다. '합병'뒤 일제가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거절했다. 이완용이 거액의 은사금과 함께 작위를 얻어 조선 제2의 부자가 되어 사는 동안 한규설은 일제의 감시 속에 분을 삭이며 살고 있었다. 이완용은 1926년 67세의 나이에 죽고 한규설은 1930년 81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두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벌써 밝고 뚜렷하게 구별된다. 한규설의 생애야 실로 '청사에 길이 빛날'만 하지만 이완용의 죄업은 만고에 지워지지 않을 만큼 무겁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의인 한규설은 잘 모르면서 죄인 이완용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고 있을까? 다른 사람의 공적이나 미덕을 보는 눈보다는 그의 허물과 과오를 찾는 일에 더 밝은 눈 때문이다. 이 점 우리 모두의 치명적인 약점이고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있는 사실에 없는 거짓까지 보태가며 부풀리는 미국인들의 '영웅 만들기'는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은 지우고 없는 허물을 털어 내 가며 죄인 만들고 욕보이기는 우리보다 더한 나라가 있을까. 현실적 모순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의 허물과 과오에만 엄정한 것은 어처구니없는 폭력이다. 이완용의 친일을 탓하기보다 한규설의 절의를 기리는 일이 한결 더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꾸중보다 칭찬이, 벌주기보다 상주기가, 부정보다 긍정이 더 힘이 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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