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순덕 수필가

청주 흥덕구 봉명2송정동 흥덕새마을금고 푸르미봉사대는 4일 관내 소외이웃을 위한 사랑의 김장 나누기 행사를 진행했다. / 청주시 봉명2송정동
청주 흥덕구 봉명2송정동 흥덕새마을금고 푸르미봉사대는 4일 관내 소외이웃을 위한 사랑의 김장 나누기 행사를 진행했다. / 청주시 봉명2송정동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부들이 모이면 대화의 시작은 누구네 집은 김장을 했고 누구네 집은 언제 하고 누구네 집은 시댁에서 혹은 친정에서 담아왔다는 김장 경험담이었다. 입동이 지나 김장철로 들어서면서부터 총각김치나 동치미로 시작된 김장에 관한 대화들이 이달 들어서는 주춤해진 가운데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김장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도 늦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아직까지 김장을 왜 하지 않았느냐고 의아해했더니 친구의 시댁이 전라도라서 충청도보다는 김장 시기가 늦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또다시 김장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요즘은 김치냉장고 때문에 김장김치 얻기가 쉽지 않은데 아직도 그 동네는 정(情)이 남아있구나 부럽다" 이웃에서 맛보기로 갖다 주신 김장김치가 넉넉하여 미루다 보니 이틀 전에 김장을 끝냈다는 말에 모두들 좋은 동네에 살고 있다고 부러워했다.

김장 품앗이가 남아있는 이곳에서는 아들 집과 딸네 집 김장까지 해 주는 어르신들의 넉넉함이 우리 집까지도 그 후함이 전해진 것이다. 이 집 저 집에서 갖다 주신 손맛이 각기 다른 서너 가구의 맛보기 김치의 양은 내가 담그려고 했던 김장 김치의 절반만큼이나 되었다. 적당히 익은 김치가 이웃의 정을 더하여 시원하게 입맛을 잡아당기는 가운데서도 올해 처음으로 뒤란에 심은 배추로 김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농약 한번 치지 않고 매일 아침 손으로 벌레를 잡아가며 기른 배추를 가르고 절이고 씻어야 한다는 과정들을 몸이 기억 해 냈는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사실 김장은 양념을 준비하고 버무리는 것보다는 절이고 씻는 과정이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친정에서 김장을 하지 않은 이후로 절임 배추의 편안함에 길들여졌던 부작용이기도 한 것이다. 몇 포기하지도 않는 요즘 김장이 김장이냐고 하시는 어르신들의 말씀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온 가족이 시골 마당에 모여 산처럼 쌓인 배추로 김장하던 생각이 났다.

오 남매의 가족들이 모여 허리가 끊어지게 김장을 버무리는 동안 마루 위에서는 어머니가 홍두깨로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준비하셨고 아궁이 한쪽에서는 수육을 삶고 화로 위에서는 양미리를 굽던 따뜻한 풍경이 동화 속의 그림처럼 떠 올랐다. 매캐한 연기 내음도 구수했던 시골 굴뚝의 정겹던 풍경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기력이 떨어진 어머니가 작은 아파트로 옮겨오면서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그때가 힘은 들었어도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회상하시곤 한다. "우리 부부가 먹으면 얼마를 먹겠니. 다 저희들을 위해서 형부가 힘들게 유기농으로 농사지어서 마련하였는데 내년부터는 김치를 사 먹자고 하길래 형부 보고 농사짓지 말라고 했어" 김장했느냐고 묻는 안부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온 언니의 볼멘소리가 조카들을 향해 있었다.

김순덕 수필가
김순덕 수필가

조카들 입장에서는 연로하신 형부가 안쓰러워서 한 말이겠거니 생각하라는 나의 위로의 말에도 언니의 서운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옛날 칼국수를 밀던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버린 언니는 겨울의 반양식인 김치를 사 먹는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김치를 사 먹자는 말이 노여웠다기보다는 부모로서 자식을 챙기는 마음을 거부당했다는 서운함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김장김치가 그저 반찬의 의미로만 남는 것이 아님을 조카들도 언젠가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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