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김윤희 수필가

부모자식 위하느라 평생 가꾸지 못한 당신,
고단한 삶, 찬 서리 하얗게 머리에 이고
굳어진 손마디에 이제야 연필을 들었습니다.

내손이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씨름하면서도
속적삼 열듯 가만가만 속내를 풀어냈습니다.
드러낸 그 맘 엮으며 나이 듦을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 그러더이다.'나이를 먹는다는 건,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가을볕에 홍시가 익듯,
당신은 고된 삶을 달달하게 자애로 익히며,
고향에서 빈 둥지를 지켜왔던 겁니다.
집 떠난 자식, 허기진 길손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고향의 까치밥!'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하고 마음이 넉넉해옵니다.

돌고개 장터로 불리던 장대마을에 올해 처음으로 한글 글방을 열었습니다.

"늙은이들이 무슨 공부여" 하면서도 시간만 되면 하나둘 모여 들었지요. 어렵게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한 지 이러구러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졌습니다. '고향의 까치밥'입니다.

까치밥이 무엇입니까. 다 따지 않고 나무에 남겨놓아 까치, 까마귀들의 먹이가 되고 있는 감 아닙니까.

찬 서리 이고 나무 끝에 매달려 겨우내 허기진 날짐승들에게 자신의 몸을 고스란히 내주고 있는 까치밥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입니다. 자식들 잘 키워 각자 제 살길 찾아 가도록 길 열어주고, 남은 빈 둥지를 지키고 있는 어머니. 가끔씩 길손처럼 찾아드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살 한 점이라도 더 내어주는 그것으로 흐뭇한 까치밥입니다.

수런거리며 가을을 익히던 우리 집 앞마당 대봉 감나무도 잎을 모두 떨구고 겨울잠에 들었습니다. 지난해보다 좀 적게 달리더니 열매는 주먹보다 더 크고 실했습니다 남편은 감을 따서 몇몇 집에 나눠주고, 일부는 상자에 켜켜이 쟁여놓았습니다. 홍시로 먹을 요량이지요. 그것으로도 서운했던지 몇몇 개는 껍질을 벗겨 처마 밑에 조르르 세로줄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오고가는 바람결에 꾸둑꾸둑 곶감으로 말라가고 있습니다. 하나 따서 씹어보니 쫀득한 내 어린 시절이 달달하게 묻어나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집에도 오래된 대접감나무 두 그루와 둥시감나무 한 그루 있었습니다. 가끔씩 홍시를 딴다는 이유로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홍시보다는 곶감을 좋아했고, 아버지는 홍시를 유난히 좋아하셨습니다.

감은 꽃부터 잎, 꼭지까지 약재로 사용되니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식품입니다. 예로부터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올랐을 뿐만 아니라 제사상에도 빠져서는 안 되는 귀한 존재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단성식이 쓴 수필집 '야양잡조'에 의하면, 감나무에는 사람이 갖춰야 할 문, 무, 충, 절, 효 오덕(五德)과 칠절(七絶)이라 하여 좋은 점 일곱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오덕으로, 잎은 넓어서 글을 쓸 수 있다하여 문(文)을 꼽고, 가지는 화살로 사용된다하니 이를 무(武)라고 했습니다. 껍질과 알맹이가 다르지 않고 똑같다는 면에서 충(忠)을, 서리가 와도 끄떡없이 매달려 있으니 이를 절개로 꼽았습니다. 또한 이가 없는 노인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홍시로 익어 몸을 내주니 효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칠절로 꼽히는 것으로는 수명이 길다는 것이요, 잎이 무성하여 좋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 집을 짓지 못하고, 벌레가 자라지 않는다 합니다. 또한 가을철 넓은 잎의 단풍도 아름다움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땡감은 땡감대로 옷감에 물을 들일 수 있습니다.

감이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하면 병원의 환자가 줄어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갖가지 효능과 맛이 으뜸으로 꼽힙니다. 실제로 감은 오행 중 水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장과 방광에 작용하는 기운인 동시에 한(寒)과 열(熱)의 균형을 잡아주는 음식입니다.

맛은 물론이고 식감 또한 다양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딱딱한 생감의 떫은맛을 소금물에 우려내면 단단하고 아삭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입니다. 서리 맞아 홍시로 무르면 한없이 부드러워 살갑게 녹아들고, 곶감으로 말려 먹으면 쫀득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감은 다른 어떤 과일보다도 우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감꽃목걸이와 함께 아련한 향수와 고향의 푸근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닌 품결을 짚어보면 마치 어머니의 품같이 베풂이 넉넉하고 푸근합니다.

김윤희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

한겨울 감나무의 까치밥으로 남아 고향의 둥지를 지키고 있는 어머니들, 70세, 80세가 넘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글씨로 쓰고, 평생 마음속에 쟁여 놓았던 속내를 도란도란 풀어놓았습니다. 글집을 보면 그 자체가 허기진 정을 달래줄 까치밥, 그 이상으로 따뜻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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