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소나무. / 클립아트코리아
소나무. / 클립아트코리아

차오르기 시작한 겨울은 수려한 산줄기에 옅은 회색 물감을 풀어 놓았다. 날씨가 차가워질수록 산은 담백한 단채색으로 선명해진다. 그 속에서 저 홀로 청정한 황장목은 사계절 변함없는 색깔로 제 몫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제 이름값을 하는 황장목은 바스락거리는 가랑잎이 흙으로 돌아가는 무렵이면 그제야 본바탕을 드러낸다. 황장목은 그 옛날 궁궐이나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던 배를 만들 때 썼으며 모든 나무 중 어른으로 공(公)같다 한다.

내 안에는 황장목으로 삶을 지켜내는 두 어르신이 계신다. 태풍에도 흔들림 없는 노송과 같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다섯 명이 같은 구역 교인의 집을 순회하며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끝나면 다과를 즐기며 그간 일어난 이야기를 나누며 담소를 즐긴다. 80대 후반의 두 남성어르신의 지나온 과거사를 듣다보면 장경동 목사나 법륜스님 못지않은 재미와 삶의 지혜를 배운다.

같은 연배이신 한 분은 젊은 시절, 토목엔지니어로 활약하시어 산업부문에서 대통령상 받기도 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빛바랜 사진이 안방 벽에 훈장처럼 걸려있다. 다른 한 분은 70년대에 건설업으로 큰 성공을 이뤄 지역에서 세수(稅收)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고 했다. 그러나 맞보증으로 인하여 한 순간에 모두 무너져버렸다. 그 바람에 영영 회복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자신이 시공한 5층짜리 아파트 꼭대기 층에서 홀로 살아가신다. 한 분은 예기치 않은 위암으로, 또 한분은 사업의 실패로 힘든 시기를 견뎌 내셨다. 수십 년 동안 절벽 끝으로 몰리는 여건 속에서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두 분을 보면 황장목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두 분은 수년 전 아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도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성숙한 신앙의 힘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날의 그리움과 현실의 냉혹한 체감경기를 공감하면서도 삶에서 요구되는 과제와 도전을 잘 감당하며, 자기 안에 바람직한 노년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신다. 언제나 깨끗한 모습으로 집안도 깔끔하게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다. 때때로 얇은 지갑을 열어 품 넓은 애정을 보여주시고, 언제나 긍정적인 태도와 검소한 생활로 자신의 절제를 놓지 않았기 때문에 유연한 삶을 이어오지 않았나 싶다. 두 분은 닮은 점도 많다. 별 욕심 없이 적고 가볍게 살며,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사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이면 복지원에서 일어교육으로 봉사를 하시고, 전국 곳곳에 자신이 손길이 묻어있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즐거움을 누리신다.

세월이 갈수록 늙고 약해진 몸과 마음의 변화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마음의 평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도 자신의 생활철학을 꾸준히 지켜내며 외롭고 초라해지기 쉬운 노년의 삶의 질도 재치 있게 유지하는 모습을 본다. 물질적 소유가 아닌 정신적, 영적으로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온 세월과 생명에 대한 감사함을 늘 표현하신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인생을 즐기신다.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오늘, 한 달 만에 방문한 우리를 위해 굽은 손으로 원두커피와 한방차를 내리시고 과일 샐러드와 크래커 카나페로 상차림을 내놓으신다. 오전 내내 정성껏 준비를 하신 음식을 대접 받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다. 몸 둘 바 모르는 우리에게 권사님은 허허 웃으시며 "내 집에 와 주는 것만 해도 고맙구만," 하신다. 두 분의 삶을 보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시기지만 그 잃은 자리에 지혜와 자비로 채우심에 존경과 감사함을 느낀다.

첫눈이 내렸다. 황장목 솔잎 위에 서설(瑞雪)이 아름답다. 겨울에 더 아름다운 황장목과 서설, 노년이 아름다운 것은 체화된 연륜이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두 분을 보며 내게 다가오는 노년도 그분들이 헤쳐 왔던 방법들이 생각하면 유쾌한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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