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색된 김들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바라만 봐도 따뜻하다. 맛을 보았다. 청탁한 세상의 맛이다. 미지의 향기다. 세상만사 잡다한 일들이 모두 녹아 나오는 듯 작은 탕솥 안에서 파도같이 일렁이는 모양새가 자못 진지하다.

"무슨 차예요 재료가 무엇인가요?" 화로 위의 탕솥 안에서 곤두박질하는 거무튀튀한 액체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어본다. "고뿔차예요" 코에 불(열)이 난다는 감기의 순우리말이다. 듣기만 해도 정감이 넘친다. 차가 많이 나는 지리산 아래 하동지역 할머니들의 삶의 지혜다. 깊고도 맑다. 고뿔차 한잔이면 동파에 서려있던 오장육보도 시원하게 뚫릴 것 같다.

다양한 차를 경험해왔지만 마실수록 묘하다. 누룽지의 구수함, 고향의 안락함, 마당쇠의 털털함, 솜털이 보송한 방년(芳年)의 싱그러움, 부러져야 제맛이 나는 쇳덩이의 강직함, 자연의 순수함. 작은 솥 안에 우주의 신비함이 모두 투영되었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 묵직한 고뿔차 한잔에 오랫동안 찾아내지 못한 차의 비밀이라도 캐낸 것 같다.

복잡 다양한 문화에 길들여진 탓일까. 차역시 여러 가지 재료가 복합된 블렌딩 티를 선호하는 추세다. 흔히들 블렌딩 티의 원조는 세계의 차 소비를 장악하고 있는 유럽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지혜였던 것이다. 조합된 재료들이 탕솥에서 어울려 품어내는 고뿔차만 봐도 그렇다. 배, 모과, 진피, 그리고 발효차가 함께 어우러진 완전한 블렌딩 차를 오래전부터 즐겨왔다. 선인들은 여러 가지 재료가 융합된 천혜의 향기를 은밀히 탐닉하면서 삶의 애고를 풀어내며 기억 저편의 세상을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차의 성품은 사람과도 닮았다. 흔히 즐기는 녹차는 일반적으로 스트레이트 티로 마신다. 녹차는 맑고 고결하다. 그래서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청렴결백한 선비 같다고나 할까. 쌉싸래한 뒷맛은 심신을 정화시킨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정(中正)의 덕(德)이 오롯하다. 이 풍진세상에 차의 성품같이 맑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이 너무 맑아도 물고기가 살지 못한단다. 그래도 맑았으면 좋겠다. 나의 심신이 맑아진다는데 이 탁한 세상에 뭘 바라겠는가.

정지연 원장
정지연 원장

좋은 차는 편견이 없다. 초대받은 관계자들은 송골 하게 맺힌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몇 잔을 마셔도 속이 편하고 마실수록 그 맛이 깊다고 감탄한다. 우리 전통의 차 문화였다는 것에 더 매료되는 것 같다. 차 자리에서 숨어있는 우리의 차를 알릴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하다. 두루뭉술하고 들쩍지근하게 올라오는 탕색에서 선인들의 삶이 보이는듯하다.

시나브로 블렌딩의 시대가 되었다. 소소하게는 혼 밥과 혼 술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만물은 교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순리를 벗어날 수 없다. 물질과 물질의 어울림, 문화와 문화의 어울림,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근본이며 진리다. 어울림은 화합이고 사랑이고 교역이고 발전이다.

인생을 아름답게 살려면 화락(和樂)을 즐겨야한다. 지금, 고뿔차는 그 단순한 진리를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간들아! 화락해야 하는 樂의 의미를 아니? / 국제차예절교육원장·다담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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