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강전섭 수필가

한 해의 끝자락이다. 간밤에 세찬 바람이 세상 시름을 달래더니 새벽 달빛이 유달리 휘황하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마지막 잎새를 보는 듯하다. 마지막 달에 일 년을 돌아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하지만, 부정의 생각보다는 긍정의 느낌이 더 많이 떠오른다.

12월은 끝과 시작의 변곡점인 달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마음이 묘하다. 세밑에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다사다난(多事多難)하고, 다희다락(多喜多樂)한 무술년이었다. 톺아보니 올해도 인연의 꽃이 뜨락의 꽃들만큼이나 활짝 핀 한 해였지 싶다. 내가 사랑하는 문학, 삶을 풍요롭게 한 문화예술의 향유, 천직이라 여기며 가르친 마지막 교직 생활, 자연의 향기를 전하던 꽃방 활동 등.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간다.

열정은 에너지다. 삶에 열정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문득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 없는 삶은 영혼에 주름을 남긴다는 말이 생각난다. 나이듦은 노련과 완숙을 의미하지만, 때론 열정의 마그마를 휴화산처럼 잠재우기도 한다. 열정이 지나치면 관계를 해친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사람 사이에 오가는 열정의 완급을 조절하는 게 어디 쉬우랴. 이럴 때마다 어머님 생각이 간절하다.

어머님이 병상에 누워 계실 때였다. 암 투병으로 무척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얼굴만 잠깐잠깐 내보이고 사라지는 아들이 야속하고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어쩜 분주하게 사는 내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조용히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둘째야! 인생 별거 아녀. 살아보니 인생은 풀잎에 맺힌 아침 이슬 같은 게야. 그러니 너무 동동거리지 말고 쉬엄쉬엄 돌아보며 살어.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 법이여. 살면서 소중한 게 무엇인지도 생각하면서 좋아하는 일 하고 사는 게 행복이여."

그때는 몰랐다. 대충 건성으로 듣고 흘려버려 무슨 뜻인지 새길 겨를도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 들어 어머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삶의 철학이 담겨 있는 귀한 말씀을 되새기며 자신을 돌아본다. 살아가며 우리가 놓치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나 많으랴. 젊은 혈기로 행한 숱한 언행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을까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숨 가쁘게 살아온 한 해이다. 혹여 내가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타인의 눈에 가벼운 사람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귀가 순해지는 나이에도 여전히 미욱하고 허점투성이다. 하지만 어쩌랴. 행하지 않으면 실수도 없겠지만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으랴. 무시로 깨닫고, 갈고 닦으며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할 때 인간은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기 마련이다.'라는 괴테의 독백으로 위안을 삼는다.

묵은해의 삿된 것을 삼키며 어둠이 시나브로 엷어진다. 기해년을 여는 여명의 등불이다. 멀리서 황금 돼지의 우렁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새 달, 새 소망, 새 각오, 새 꿈을 잔뜩 품은 붉은 태양이 활어처럼 팔딱이며 떠오르리라. 새해는 분노와 대립, 좌절과 절망으로 거칠게 타오르는 성난 촛불이 아니라 희망과 환희를 피워내는 거룩한 횃불을 높이 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새해에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겠다. 책방에서 새 책을 뽑아들 때 풍기는 종이 냄새를 맡고 싶고, 차 한 잔 마시며 책장 넘길 때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뜨락에 핀 들꽃들에게 사랑을 전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련다. 무엇보다 문학의 향기에 빠진 혜안글방 식구들의 환한 웃음소리를 자주 듣고 싶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단거리가 아닌 장거리 경주이다. 지난날 나의 삶이 좋든 싫든 간에 받아드려야 한다. 분주한 일상을 내려놓고 숨고르기를 해야겠다. 인생 2막을 준비하며 소확행의 삶을 가꾸고 싶다. 이제 알레그로가 아닌 라르고의 걸음으로 걸어가리라.

강전섭 수필가
강전섭 수필가

약력

▶ 2015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 사단법인 딩아돌하문예원 이사 겸 운영위원장, 청주문화원 이사
▶ 우암수필문학회, 충북수필과비평작가회의, 청주문인협회 회원
▶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 청주대성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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