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모임득 수필가

2012년 봄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1858~1924)의 3대 작품이 모두 서울에서 공연된다. '라 보엠'과 '나비부인', '토스카'가 차례로 관객들의 박수를 기다리고 있다.  / 뉴시스
2012년 봄 오페라의 거장 푸치니(1858~1924)의 3대 작품이 모두 서울에서 공연된다. '라 보엠'과 '나비부인', '토스카'가 차례로 관객들의 박수를 기다리고 있다. / 뉴시스

겨울바람이 싸늘하지만 투명한 숨결을 전해오는 12월, 나비부인을 보았다. 뮤지컬이나 다른 공연은 많이 보았어도 오페라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장르이다. 묵은 김장김치처럼 오랫동안 숙성되었어도 그 맛을 잃지 않는 것이 클래식이라는 강연을 들은 적 있다. 몇 백 년이 넘는 동안 좋은 음악들만 명맥을 이어온 클래식이라서 그럴 테다. G.푸치니의 3대 걸작 중 하나인 나비부인을 아들과 볼 수 있다는 것에 가슴 설레며 기다렸다. 대학생 아들이 오페라를 보고 리포트를 써야한다고 했다. 다행히 종강한 이튿날 공연이 있어 표를 예매하려고 인터넷에 들어갔다가 놀랐다. 빈 좌석이 많지 않았다. 비싼 공연임에도 청주에서 관람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에 기뻤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하는 오페라는 2층 앞줄이 제일 좋다는데 빈자리가 없어 1층 앞자리로 정했다.

기울어진 집안을 위해 게이샤(일본기생)가 된 15살 꽃다운 아가씨, 나비부인은 친척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개종까지 하며 새로운 삶의 희망에 부풀어 미국 해군 중위 핑커튼과 결혼한다. 승려인 숙부의 소동으로 친척들이 다 돌아간 뒤 저녁노을 속에서 사랑의 2중창을 부르는 핑커튼과 나비부인. 푸치니의 2중창은 길고도 유려하다.

1막이 끝나고 2막에서도 무대 보랴, 자막 보랴, 난방을 덜 해서 추위에 몸 움츠리랴 정신없는 내게 아들이 속삭였다."엄마, 이 음악 '어떤 개인 날'이야" 순간 멍했다. 오페라는 스토리를 보러 간다기보다 음악을 들으러 간다고 했는데 난 자막을 보는데 집중하였다.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는 성악을 이해는 못하더라도 바로 앞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주인공 초초상(나비부인)이 부르는 아리아를 들었어야 했다.

핑커튼이 결혼한 나비부인을 두고 미국으로 건너간 지 3년, 기다림에 지친 그녀의 노래, 다들 한 번 떠난 서양군인들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초초상에게 말을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고 있는 초초상에게는 오늘도 어떤 개인 날이다. 그제서야 오페라는 가사로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이야기를 한다는 게 느껴졌다. ...어떤 갠 날에 수평선 너머로 한 줄기 연기가 오르면 ... 조금만 귀를 기울였는데 음악이 내게 말을 건네 온다. 어떤 개인 날 바다를 바라보며 애타게 그리는 한 여성의 기다리는 마음이 들어온다.

3막에서 순수한 나비부인의 사랑을 알게 된 핑커튼은 이별을 고하는 아리아를 부르며 괴로워한다. 나비부인은 핑커튼의 미국부인 케이트가 아이를 키우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모든 것을 단념한다. 아버지가 물려준 단도에 새겨진 '명예로운 삶을 못 살 때에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는 문구를 읽으며 자결하는 나비부인.

모임득 수필가
모임득 수필가

나비부인에 나오는 계약조건은 하인을 포함해서 집을 999년간 임대할 수 있으며 계약은 언제든지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국제결혼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취해 나비부인 못지않은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아리아. 절규하는 초초상이 마지막 자결하는 장면에서 눈물 흘리는 나를 아들이 손을 잡아준다. 눈앞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마이크 없이 부르는 성악가의 노래는 싱싱한 생기가 넘친다. 예술의 전당을 나오자 바깥 시간은 캄캄하게 박혀있었다. 내밀하게 익어가는 겨울의 온도, 슬며시 아들의 팔짱을 꼈다. 가슴이 말랑말랑해졌다. 오페라의 매력에 빠져든 날. 따뜻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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