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보람 청주시 서원구 세무과 주무관

교실. / 클립아트코리아
교실. / 클립아트코리아

한동안 조용했던 중학교 동창들과 연락하는 단톡방에 수십 개의 대화가 올라왔다. 한 친구가 올린 문정희 시인의 시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 (중략) /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 문화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 그 많던 여학생은 어디로 갔을까 /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1997년에 지어진 시가 지금도 나와 친구들에게 위화감 없이 다가온다.

이 시를 올린 친구는 감잣국과 자신의 처지가 똑같다며 하소연을 했다.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고 명문대를 나와 전문직에 종사했던 소위 '제일 잘나가던' 친구였다. 지금은 전업주부로 두 아이와 고군분투하며 지내고 있어 동창들의 애경사에서도 자주 보기 힘든 얼굴이다. 이 시에 공감한 한 친구는 아이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아이를 키우던 중 다니던 회사에서 다시 함께해 줄 수 없겠냐는 연락을 받았지만 아직 어린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없다는 남편의 반대로 출근의 꿈은 무산됐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는 결혼을 하면 승진에서 밀리기 때문에 결혼을 미뤘다고 한다.

남편과 자녀의 조력자가 되기 위해 나의 일을 포기하거나 나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음을 이제야 실감했다. 필자는 운 좋게도 공직에 몸을 담게 돼 제도적인 뒷받침과 육아휴직을 당연시하는 조직문화 덕분에 출산과 육아에 대한 배려는 받았을지언정 업무상 불이익은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처우가 다른 직장 맘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불편하다. 직업이 무엇이든 직장이 어디든, 육아시간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인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엄마가 결국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어느 여자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결혼을 하려 하겠는가?

현재의 결혼제도가 불평등하다고 말한다면 남성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본인이 아이와 직장 중 아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아이와 직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선택지가 주어진 것은 아닌지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박보람 청주시 서원구 세무과 주무관.

문정희 시인은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쳤다고 한다. 영특하던 제자들이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을지 아이를 낳고 보니 더욱 와닿았다. 작가가 비통해 했던 1990년대와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엄마와 아내의 삶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할머니가 그랬듯, 엄마가 그랬듯, 나의 딸도 세상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의 성실한 들러리로 살아가게 할 수는 없다. 결혼과 출산이 이루고자 하는 꿈에 걸림돌이 아닌 자양분이 되는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조금씩 천천히 우리 모두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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