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최용현 변호사·공증인

프랑스의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영국 대의제도를 빗대어 "영국인들은 의원을 선출하는 동안만 자유롭고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노예가 된다"고 조롱했다.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현대정치에서 정치행위자는 직업정치인, 관료와 같은 전문 정치집단 뿐이고, 민주주의는 이들 정치집단에게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는 요식절차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시민들은 오직 몇 년에 한번 정기적으로 투표할 뿐, 그 이후 대표나 관료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서도, 그들의 일에 참견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조롱하고 슘페터는 찬양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양자 모두 현대 대의정치의 근본적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 정치에서 시민들은 단지 구경꾼으로 전락했고, 일상의 반복되는 제도권 정치는 선출된 대표들과 고위관료들의 전유물일 뿐이다.

정치엘리트들의 이러한 정치 전유(專有)의 정도와 그에 따른 폐해가 우리 지역만큼 심각한 곳도 없는 것 같다. 김현수 초대 청주시장을 제외하고는 그간 모든 도지사와 시장은 중앙과 지방의 고위관료 출신들이 차지했다. 많은 단체장이나 국회의원들이 민주당 간판을 달고 있지만, 한국당 출신들보다 더 보수적, 관료적이라고 평가받는 곳이 또한 우리 지역이다. 더불어 지역정치에서 의제 선정부터 최종 정책결정까지 모든 절차에서 시민들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의제는 철저히 단체장의 필요나 이익에 따라 선정된 것이고, 여론조사나 공청회를 치루지만 이는 시민 의견을 청취했다는 알리바이를 위한 마지못한 요식절차일 뿐이고, 대안모색과 조정안도 관료들의 동심원적 상상력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청주시청사 이전, 제2쓰레기매립장 신설, 복합쇼핑몰 유치여부 및 유치장소, 오송역세권 개발, 청주야구장 신축, 무예마스터십대회 계속여부 등 지역의 중대현안들 모두 그렇게 등장했고, 그렇게 처리됐고, 그렇게 처리될 예정이다. 그에 따라 시민들의 불만은 누적되어 지방자치 자체에 대한 외면과 냉소는 증대되고, 최종 결정은 갈등 해소는커녕 최종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오히려 새로운 갈등을 추가로 야기했다. 이것이 우리 지역 지방자치 현실이다.

중대한 지역 현안에서 왜 시민들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이것이 왜 단체장의 재선의 필요와 고위관료들의 관료적 이해에 따라서만 선택되고 결정되어져야 하는가? 선거뿐만 아니라 선거 이후의 일상의 제도권 정치에서도, 형식적 여론조사나 공청회를 넘어, 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지자체의 의제나 정책을 선택하고 결정할 순 없는가?

금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 시도되는 참신한 대안이 있다. 바로 시민-추첨 의회제도이다. 현대의 발달된 통계기법을 사용하여 시민들의 연령과 지역, 직업 등에 비례하게 시민의 대표를 추첨으로 선출하여, 그들에게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토록 하는 등 상당기간 당면한 의제와 정책을 숙의토록 한 후, 최종적으로 이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다소 생소하고 황당해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제도는 국민참여재판, 주민참여예산제, 원자력공론화위원회 등에서 변형되어(추첨 불채택, 최종결정권 배제 등) 도입되고 있다. 이 제도는 시민의 적극적 정치참여를 유도하고, 시민들의 의사와 이익을 제대로 반영하고, 소모적인 논쟁과 갈등 비용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일정 규모의 주민 제안으로 의제를 선택하는 주민발안제도를 더욱 확충한다면, 보다 참신하고 친시민적인 지방정치가 가능하다. 시민-추첨 의회제도로 지방의회를 보완케 하거나 적극적 주민발안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현재도 법개정 없이 시행할 수 있는 것들이다.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최용현 공증인·변호사

제갈량은 정치의 근간은 '집사광익(集思廣益, 여러 의견을 모으고 이로움을 널리 알린다)'에 있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집단지성'의 우월함을 강조한다. 우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미래가 시민-추첨 의회제도에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는 시작점은 항상 생경하지만 참신한 상상에 있다. 이시종 지사와 한범덕 시장에게, 관료적 포획에서 벗어나 2019년에는 새로운 제도적 상상을 해보길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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