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산림청에서 실시한 산촌거점권역 육성 공모사업에 괴산군이 선정돼 귀산촌 핵심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괴산군 산막이옛길 등잔봉에서 바라본 한반도 지형.<br>
산림청에서 실시한 산촌거점권역 육성 공모사업에 괴산군이 선정돼 귀산촌 핵심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게 됐다. 사진은 괴산군 산막이옛길 등잔봉에서 바라본 한반도 지형. 본 사지는 칼럼과 관련이 없습니다.

일찍이 김동인은 이광수 문학의 선구적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파했다. "그가 처음에 사회에 던진 문학은 반역적 선언이었다. 실로 용감한 돈키호테였다. 그는 유교와 예수교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는 부로들에게 선전포고하였다. 그는 결혼에 선전포고하였다. 온갖 도덕, 제도, 법칙, 예의, 이 용감한 돈키호테는 재래의 '옳다'고 생각한 온갖 것에게 반역하였다". 동료 문인에 대한 찬사로서는 파격적이다. 김동인이 지적한 대로 이광수 문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혁명이었다. 재래의 봉건적 문학 양식을 일거에 무너뜨린 문학적 성과가 그러했지만, 그 문학을 통해 구현해 낸 정신사적 변화는 더욱 그렇다. 아마도 이광수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오랜 기간 낡은 봉건 유제의 볼모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점 이 땅의 후예들은 모두 이광수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

이런 이광수가 평생의 지기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살아온 사람이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다. 두 사람의 관계를 조선희는 지난해 펴 낸 '세 여자'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은 시작과 끝이 수미일관(首尾一貫)했다. 한일합방 날 자결한 금산 군수의 아들로 양반 가문 출신인 홍명희와 지지리도 가난한 집 아들로 양친 모두 콜레라로 잃고 열한 살에 고아가 된 이광수. 일본 유학 시절 이래 이광수는 홍명희에게 친구이자 친형처럼 의지했고 번갈아가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고 이광수가 어마어마한 작품을 양산하는 동안 홍명희는 '임꺽정' 하나를 썼고 이광수가 친일전선에 발 벗고 나선 일제 말기를 홍명희는 은둔과 침묵으로 보냈고 서로 인생관과 정치관이 엇갈려 꽤 긴 시간을 멀찍이 바라보는 사이였지만 결국 이광수의 최후를 홍명희가 거두었다.

이광수는 잘 나갈 때도 불행해 보였고 홍명희는 풍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느긋한 한량이었다.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각기 다른 삶의 길을 걸으면서도 돈독한 우애가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넉넉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07년 일본의 타이세이(大成)중학에서였다. 일곱 살 위인 벽초는 춘원에게 바이런의 시와 나쯔메 소오세끼의 소설을 권하고 자기의 책을 빌려 주었다. 이런 그를 춘원은 '문학의 선배'였다고 회고했다. 문일평 최남선 정인보 등을 소개하여 평생의 벗으로 살게 한 가교 역할을 한 것도 벽초였다. 옹색하던 상해 망명 시절엔 둘이 한 침대를 쓰기도 했다. 일제 말기 '이광수 매장론'이 들끓을 때 찾아가 격려해 준 것도 홍명희였고, 전쟁 중 납북당해 위독한 지경에 이른 이광수를 인민병원에 입원시키고 사후 뒷수습까지 솔선한 것도 홍명희였다. 홍명희가 얼마나 품이 넓은 사람이었는지, 그의 사람됨을 헤아릴 수 있게 해 주는 일화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광수와 그의 성취를 제대로 이해하고 올곧게 평가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홍명희와 이광수도 역사에 남긴 공.과가 선명하게 구별된다. 두 사람 다 이 땅의 문학사와 지성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이광수는 '친일', 홍명희는'친북'이라는 오명을 남긴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예우는 상반된다. 이광수는 친일의 아이콘이 될 만큼 논죄와 비판의 입질에 올라 있지만 홍명희의 친북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용단으로 미화되거나 아예 치지도외하고 있다. 청주에서는 해마다 홍명희 문학제가 열리고 괴산에 있는 그의 생가는 '문화재'가 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이광수는 그 이름을 단 문학상 하나, 문학관 한 채를 세우지 못한 채 팽개쳐 두고 있다.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표언복 대전 목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1948년 북으로 가 부주석의 자리에 있으면서, 민족 분단과 민족적 비극을 강제한 김일성 체제 수립에 기여한 홍명희 만년의 행보는 민족적인 것일까. 친일은 적대적인 이민족에 대한 협력이기 때문에 반민족적이고 친북은 같은 민족인 김일성과 그 세습체제에 대한 협력이기 때문에 민족적인가. 자유 민주주의에 반하고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세력이라면 누구나 똑같은 우리의 적일 뿐이다. 친북이 친일과 다를 게 없는 이유다. 그러나 홍명희는 기리고 기념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반대로 이광수는 지금처럼 '친일파'란 주홍글씨를 달아 방치하고 수모를 주어도 좋을 인물이 아니다. 홍명희가 '임꺽정'의 작가라는 이유만으로도 칭송받아 마땅한 인물이라면 이광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유로 기리고 기념해야 할 인물이다. 남의 허물 정죄하기에 민첩하고 편 갈라 무리짓기를 능사로 아는 습벽이야말로 서둘러 버려야 할 반민족적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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