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동굴. / 클립아트코리아
동굴. / 클립아트코리아

문자를 받고 깜짝 놀랐다. 며칠 후 동굴 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설마 동굴에서 밥을 먹을까, 생각했지만 내용으로 봐서는 꼭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는 동굴 같은 데 좀 무서워요.'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깔깔 웃으며 그런 건 아니란다. 며칠 후 약속한 장소를 향해 목벌 길을 가면서 생각이 많았다. 나에게 목벌 길은 아주 익숙하다. 할아버지 댁이 목벌이었고 더 가면 나오는 '밍개'라는 곳에서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시절 자란 곳이 '하느골'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에 다 잠기고 하느골만 남아있다. 3~5살 쯤 살았던 하느골, 그 시절 기억은 별로 없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큰 느티나무는 또렷이 떠오른다.

잠시 후 '활옥동굴'카페 입구에 도착했다. 카페에 들어서니 공장을 그대로 두고 외벽이나 천장을 다시 꾸민 것 같았다. 천장이 높은 실내에 당시에 쓰던 아주 큰 기계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는 가장 높은 곳 테이블에 앉아 그동안 밀린 얘기를 하며 맛있게 점심식사를 마쳤다.

그러다 운이 좋게 우리는 활옥동굴을 보게 되었다. 아직 작업 중이라고 했지만 나름 열심히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300HP권양장과 동굴에서 떨어진 물위에 오리배, 와인전시와 김치와 새우젓 등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는 곳, 반짝반짝 동물과 물고기 등의 빛조형물, 건강테라피 체험시설, 교육장 등 테마가 있는 동굴공원은 대단했다.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하니 정말 설레고 기대가 된다. 특히 동굴을 보면서 가슴이 턱, 하고 막힌 곳이 있었다. 내가 본 장소에서 900미터를 쭉 내려가 작업을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난 아버지가 떠올랐다. 사실 활옥동굴에서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시간 삶의 모든 시간을 보냈다. 난 그렇게 보고 싶었던 동굴을 거의 50년 만에 본 셈이다.

어린 시절 난 하느골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다. 그때 아버지는 활옥동굴에서 일하는 광부였다. 이 동굴은 약 100년 전 일제시대부터 활석, 활옥(백옥 포함)광산으로 개발되어 연인원 8천명 광부들이 일했다고 한다. 설계 기록상 약 57km(비공식 87km)의 많은 광구가 있다고 한다. 새벽 아버지는 나를 두고 일을 하러 가셨다. 어린 나는 아마도 혼자 집에 있는 것이 무서웠는지 계속 아버지를 따라갔다고 한다. 칭얼거리는 나에게 아버지는 막대기를 흔들며 집에 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래도 쫄래쫄래 따라와 돌을 던져 겨우 떼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속은 어떠하셨을까? 또 어린 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루 종일 그 깊은 굴속에서 고된 일을 하며 혼자 남겨진 아이 때문에 많은 생각을 품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지금 아버지는 많이 아프셔서 외출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새롭게 변신한 활옥동굴 얘기에 또 눈을 반짝이며 말씀이 많아진다. 아버지는 활옥동굴을 어떻게 기억하실까? 지금은 오래 걸을 수 없어 힘들지만 나무에 연둣빛 물이 오르고 진달래 피면 아버지와 함께 활옥동굴을 찾고 싶다. 아버지가 없는 훗날, 문득 아버지가 그립거나 내 유년시절이 흐려질 때면 활옥동굴을 찾을 것이다. 그곳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고 가난하고 외로웠지만 잘 견디고 큰 어린 나를 만나 가끔은 칭찬도 해줄 것이다. 높은 적외선과 음이온이 풍부해 미세먼지, 황사 등 공해대책에 안성마춤이라는 '화옥동굴'이 오래오래 사랑 받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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