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설날에는 윷놀이를 하곤 했다. 구정 아닌 신정에도 그 아름다운 풍습은 따라가 그것은 함께 모인 가족이나 이웃의 즐거운 오락거리였다. 공동체 문화가 퇴조되면서 윷놀이 역시 줄어들어 설날에 윷을 던지는 풍경도 꽤 사라진 듯하다.

빽도는 누가 만들어냈는지 알 길 없지만 탁월한 재치이다. 윷놀이에 드라마틱한 역동성을 가한다. 추격하는 말을 잡을 수도 있고 앞으로 멀리 달아나야할 순간에 후퇴하게 되어 윷판을 웃음판으로 만든다. 첫점에서 빽도를 하면 바로 골인지점으로 건너뛰는 횡재를 얻는다. 그러다가 거기서 잡히면 쓰라림이 곱절되는 등 상당한 재미를 부여한다.

윷놀이의 또다른 형태를 본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고향인 청주의 중앙공원을 거닐 때였는데 그 방식이 이색적이었다. 바닥에 백묵으로 하얀 금 두 개가 병렬적으로 그어져 있다. 그중 한개의 금 밖에 서서 금 두 개를 넘도록 윷을 던진다. 윷이 금에 걸리면 실격이다. 내기가 걸린 듯 긴장감이 팽팽했다.

저렇게 금을 그어 윷놀이를 하는 것을 처음 본 나로서는 의아했다. 저 방식이 전래 고유의 것인지 아닌지 헷갈림이 왔다. 전통에 서구적 합리가 가미된 것 같기도 했다. 윷놀이엔 고도의 합리 즉 윷의 안팎인 음양, 윷 네개인 사상(四象), 도개걸윷모의 5 행이 담겨 있다. 말판의 29 개 점은 북극성 하나에 28개의 별자리를 더한 수이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돌고 있는 형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28 수는 4 * 7 즉 칠성의 의미가 머금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기에 윷놀이가 천문도와 연결되기도 한다. 이처럼 윷놀이에는 우주 질서가 배어있는데 저 방식은 그 유래가 어떻든 간에 이분법이 들어간 것이다. 나로선 색다르긴 한데 가벼운 슬픔이 일었다. 윷놀이는 공동체 문화에 어울리게금 둥글게 모여 윷을 던지는 구조가 원형일 것이다. 이편 저편 나뉘어지지만 윷이 던져지고 떨어지는 땅은 나뉨 없이 하나이다. 그것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다. 하늘로 던져진 윷은 통짜배기인 땅에 떨어지는 거지만 땅이 금들로 인해 갈라져 있기에 전래의 방식에 깃든 묘미가 반감되어 보였다. 물론 그렇게 된 상황과 편리성, 문화적 궤적 등이 있겠지만 말이다.

인간을 정의하는 개념은 다양한데 문화사학자인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정의한다.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라고도 그는 말했다. 문화 속에서 놀이의 가치 평가를 제대로 해주지 않던 당대에 파격적인 주장이며 놀라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는 말이다. 문화는 고대의 종교성이 녹아 있는 것 외에도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성도 신이나 보이지 않는 질서와의 놀이라고 해석해도 오류는 아닐 것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인간은 어떻게든 논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논다. 놀이의 양상은 세계적으로 그야말로 천태만상일 것이다. 윷놀이는 세월에 따라 이런 저런 방식들로 변형된 옷을 입기도 하지만 우주의 원리가 배어 있는 탁월한 놀이이다. 문화가 곧 놀이임을 생각하다면 윷놀이처럼 문화 체험에 효과적인 것도 많진 않을 것이다. 윷놀이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둘 이상이 함께 어울려 한다. 윷이 하늘로 던져지면 땅으로 떨어진다. 그 순간 네 개의 윷가락의 양상에 따라 어울린 사람들간에 희노애락이 펼쳐진다. 우주의 원리가 지상의 삶과 은근히 합성된다. 공동체 문화가 붕괴되다시피한 메마른 현대 사회에 윷놀이의 아름다운 메아리가 고스톱 같은 놀이나 건조한 개인주의적 놀이들 틈에서 보다 강하게 번져 나간다면 문화 및 교육의 바탕이 한결 기름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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