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민정 수필가

지난 일 년은 소풍 가듯 지내왔다. 그렇다고 설렘이 있었거나 숨겨놓은 보물을 찾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별 일 없이 살아 온 날들이 그저 감사 할 따름이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전히 변한 것 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투명한 하늘 아래 부끄럼 없이 내민 민낯 같은 삶은 지난 한 해도 수평으로 안주했다. 익숙했던 생활이 반복되는 일상이 속절없이 지나가고 주어진 시간을 초연하게 걸어온 것 같다. 희열의 열망도, 정서적 고통도, 질병의 두려움 같은 수직적인 삶에 부딪히지 않고 지나온 것은 순탄한 삶을 지향하는 내 자신의 성격과 하늘이 보호하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시간을 가야 할 때 가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추며 시간의 안내자에 몸과 마음을 맡기며 순리대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어릴 적 소풍은 선생님이 안내자가 되어 그저 쫒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선생님을 따라 가는 길이 험하고 거칠어도 선생님의 인도와 보호아래 마냥 즐거웠다. 가자하면 가고, 서라하면 섰던 소풍 길에 선생님을 뒤따르는 일은 거친 광야에서 아무것도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마라, 내가 지켜주마 하던 모세 뒤를 따르는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생의 길잡이가 필요한 시기는 아니지만, 함께 동행 해 줄 무언가는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가족이건, 친구이건 사람마다 각자 다르겠지만 자신의 삶의 목적지까지 동행 해 주는 것이 반드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안다. 믿음의 신이 될 수도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일수도, 봉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자유롭고 포근하게 위로 받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최고의 동행이 될 것이다.

나에게는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절친 하나가 있다.

애호박과 양파. 두부를 넣은 구수한 된장찌개. 갓 구운 생선 한 토막으로 밥상을 나누며 허물없이 지내온 50년 지기이다. 중년을 바람의 계절로 살아 온 내게 친구는 칭찬보다는 격려와 위로로 버팀목을 세워준 우애가 두터운 친구이다. 엊그제 그 친구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의 남편이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이라며 절박한 심정을 알려왔다. 이것이 정녕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학창시절부터 두 사람의 열애를 모두가 부러워했었다. 지금껏 건강했고 정 많고 배려심 많은 친구의 남편이 하루아침에 중환자라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후로 요 며칠 친구의 시련 앞에서 하루하루를 같은 마음으로 능선을 오르고 있다. 절망과 낙망으로 길을 잃은 친구는 그 어떤 위로도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한다.

지금도 그 날의 둘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늦여름 밤, 같은 마을 친구가 초대한 남고생과 여고생들이 마을 뒷산에서의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밤을 지새운 순수한 추억이 만들어 준 인연이었다. 그 후로 둘은 일찍이 가정을 이루고 꽃을 피웠다.

친구는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소망의 오로라를 찾기 위해 구도자의 길을 서슴지 않았다. 날씨가 추우면 추울수록 더 선명하게 보이는 오로라를 찾기 위해 밤을 새우고, 추위를 막아 줄 천막이 없어도 희망의 한 줄기 빛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오직 남편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였다.

"친구야, 나, 이제부터 20살로 돌아가 00씨와 마지막 열애를 시작할거야!"

김민정 수필가
김민정 수필가

그녀가 보내온 한 줄의 문자 속에는 비장함과 애절함이 묻어났다. 백 마디 말보다 이 한 줄 마음이 가슴이 시리고 저려왔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무지개도 뜨지 않는 법이야, 친구야 힘내라."

세상에 그 어떤 방식으로도 풀 수 없는 방정식은 인생의 방정식이라고 했는가?.

올 한해, 비바람 눈보라가 앞길을 막아도 서슴지 말고 소풍가듯 희망을 안고 걸어가길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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