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김동우 YTN 충청취재본부장

포스트휴먼(Posthuman). 앞으로 지구 주인이 될 인간상(像)을 말한다. 아직 오지 않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지혜로운 인류) 다음에 올 인류다.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을 함축한다. 많은 미래학자나 정보통신 과학기술학자는 이를 인정한다. 과학기술이 물리현상을 넘어 인간 육체와 정신까지 분석, 조정, 조작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창조한 인간의 신비감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보면 맞다. 과거에는 인간과 기계와의 경계가 분명했다. 그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인간의 조정을 받던 기계가 오히려 인간을 조정하거나 인간과 대등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와 포스트휴먼을 이어주는 중간 단계, 현재 출현한 인간상이 트랜스휴머니스트(Transitional-humanist)이다. 인공지능 AI(Artificial intelligence)나 사이보그(Cyborg) 등이 대표적 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는 기계적 특성은 물론 인간의 특성도 지닌다. 사고를 하거나 감정을 느낀다. AI 알파고(AlphaGo, Go는 바둑을 의미)는 인간과의 대국(對局)에서 완승을 거둬 인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생물유기체인 인간의 능력을 넘보거나 앞서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그것도 아주 영리한 인간을 말이다. 또 그 영리한 인간은 보다 영리한 인간을 창조할 것이다. 포스트휴먼 도래 후에는 인간에 의한 창조론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머지않아 포스트휴먼의 도래가 정말 분명한 것일까?

인간중심주의자들은 포스트휴먼의 탄생을 부정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의 가치만을 인정하고 인간 이외의 자연물과 인공물 등 모두 존재를 인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인간 이외 어떤 존재도 인간 위에 위치할 수 없다고 믿는다. 아무리 인공지능이나 사이보그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모방했다 하더라도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 그저 인간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간이 뛰고 날아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처럼 포스트휴먼도 인간 아래에 있다.

그래도 도래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맞아야 할까?

과학기술 발전의 총아(寵兒),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활세계를 아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자칫 인간은 인공지능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주객전도가 예상된다. 심지어 인공지능은 인간의 존재마저 의심하게 한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는 행위는 '제 분수를 모른 채 수레를 막겠다고 버티고 서 있는 사마귀(螳螂拒轍-당랑거철)'와 다름이 없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하지만 사마귀 행위를 무모하다고만 비난할 수 없다. 인간은 인공지능 때문에 인간성을 상실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의 위치를 탈취당해서는 안 된다. 방법은 인간이 '사회적 사실(social fact)'에 통제를 받듯이 인공지능도 외재성과 강제성을 띤 규칙, 이른바 '기계적 사실(Mechanical fact)'에 통제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서거나 맞서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규칙, '기계적 사실'을 만들어 인공지능에 미리 내재화(Internalization) 또는 사회화(socialization)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계적 사실'은 판옵티콘(Panopticon) 역할을 하지 않을까? '기계적 사실'을 내재화, 사회화한 인공지능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한다. 죄수들이 감옥 중간에 설치된 불투명한 유리 감시탑만 보아도 스스로 감옥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말이다.

머지않아 영화 속 터미네이터, 사이보그가 곳곳에 출현한다고, 스마트폰처럼 인공지능을 휴대한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그것이 인간다운 삶이겠는가? 인간은 '붕어가 아닌 앙꼬가 주인인 붕어빵 꼴'이 되면 인간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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