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주장만 줄창 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정치판이 심한데 그 동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도처에 그런 불미한 풍경이 만연하다. 우리 사회의 한 면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괄호가 떠올랐다.

쌩뚱맞을 수 있겠다. 수학 기호의 하나인 괄호는 식의 계산 순서를 구별하기 위한 묶음표이다. 그것과 정확히 대응되진 않는데 철학에도 괄호라는 말이 쓰인다. 철학자 후설이 좋아하는 말로 괄호 치기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진실에 닿기 위해 판단 자체를 괄호에 넣기 즉 판단 중지를 하자는 것으로 해석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원어로는 에포케(epoche)라고 한다.

우리가 통상 내리곤 하는 판단은 진정한 판단과 거리가 먼 것이 허다하다. 주워 들은 것들, 누군가 한 이야기, 책에서 본 것들, 알게 모르게 주입된 것들, 사회적 통념들이 우리 몸에 내재화되어 그에 따른 기계적 행동을 하고 있다고 극단화시킬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매일 내리는 판단이 역설적이게도 오류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화도 이러한 미흡한 판단력 간의 상호작용인 경우가 많다. 토론이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일상 대화가 판단력이 정확한 상태에서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또다른 폭력을 낳을 수 있다. 일상 생활이 돌아가는 흐름엔 무수한 것들이 내재되며 그것들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럼에도 후설이 말한 괄호 치기 즉 판단 중지의 가치는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일상 생활에 보다 많이 스며들면 이해와 관용, 배려가 커져서 삶과 사회에 향기가 흐를 것이다.

후설이 태어나 살던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까지에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산적했을 것이다. 후설에 따르자면 당시 학문 세계에선 실증주의, 심리주의, 역사주의가 지배적이었는데 그 모두가 한계가 있었다. 후설은 치열하게 고뇌하며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그 결과 괄호 치기 곧 판단 중지가 절실하고 유효한 철학적 도구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 개념 외에도 다른 개념들을 주춧돌로 삼아 현상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태동시켰다.

우리가 괄호를 배운 것은 초등학생일 때이다. 그 수업 시간에 괄호에 대해 이처럼 또달리 풍성한 이러한 의미를 담을 수는 없었을까. 지나간 시대는 그렇다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핀란드는 학교에서 과목을 제거했다고 한다. 교육에서 앞선 핀란드답게 새로운 혁신이다. 바람직하게 보이고 부러움도 생긴다. 핀란드의 새로운 수업 시간에 수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현상학의 이 괄호의 개념이 통섭적으로 들어가지 말란 법이 없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에 문제가 많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제도 자체를 고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시간을 요할 것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수학 시간에 괄호가 나올 때 괄호에 대해 이러한 의미를 말할 수도 있고 그 이상으로 자유롭게 상상해서 말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교육 환경이 바뀌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얼마나 신선한 자극을 받음과 동시에 상상력이 가동되겠는가.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이 자기 주장만 줄창 하는 무례와 폭력성이 만연된 우리 사회. 그 원인을 파헤치면 숱한 것들이 딸려나올 것이다. 잘못된 교육도 그 중 하나일텐데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괄호에 대한 철학적 의미가 피부에 와닿도록 이해되고 번져나간다면 그 잘못된 습성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올리며 사회를 윤택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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