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서 배우고 실험하며 성장하는 '놀이터'

비영리 커뮤니티 공간인 서로봄에서 엄마와 아이들은 손춤을 추고 놀이 밥을 먹으며 함께 배우고 성장한다. 요일별 공간지기들과 만만한공작단에 참여하는 어린이들이 서로의 봄날을 응원하며 활짝 웃고 있다. / 김정미

[중부매일 김정미 기자] 누구나 꿈꾸지만 현실에선 보기 드문 무모한 실험이 펼쳐지는 곳, 놀이를 밥으로 먹는 아이들과 실패할 용기를 응원하는 어른들. 대전시 유성구에 위치한 프로젝트 공간 '서로봄'에선 무엇이든 가능하다. 상상한 대로 만들어보고 도전하고 기꺼이 주저앉아보면서 함께 성장하고 이웃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전시는 지난해 프로젝트 공간 '서로봄'을 지역의 우수 마을공동체 사례로 소개했다.

#마을을 변화시킨 씨앗, 공간

대전시 유성구의 대표적 도시개발지역인 학하·덕명지구는 갖춘 것보다 없는 것이 많은 지역이다. 아파트단지를 제외한 주택가 상황은 더 열악해서 이웃 간 소통도 생활, 문화, 교육에 대한 정보 교류도 쉽지 않은 구조였다.

모든 것이 관주도로 새롭게 조성되고 있던 상황에서 주민 목소리가 모이기 시작한 것은 3년 전부터. 결집의 계기는 놀이터였다. 오래 방치해 쓸 수 없는 놀이터를 사용자 중심으로 재조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몇몇 엄마들이 직접 마을 자원조사를 시작하면서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가 생겼다.

"학하지구에는 유난히 어린이공원이 많아요. 하지만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는 적었죠."

'놀이터 안전'을 주제로 마을자원조사에 나섰던 권은진씨는 "학하지구 내 11개 놀이터 가운데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에 불과했다"며 "놀이터다운 놀이터를 행정기관에 제안하기 위해 주민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주민들은 스스로를 '우동터(우리동네놀이터공작단)'라고 불렀다.

초등학교의 등하굣길과 어린이공원을 직접 걷고 찾아다니면서 마을의 이슈를 논의할 공동체 필요성도 절실히 느끼게 됐다. 주민 간 소통과 교류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십시일반 마음을 보태는 사람이 늘었고, 2017년 마침내 비영리 프로젝트 공간 '서로봄'이 문을 열었다. 주택가의 부족한 편의시설, 어린이 안전, 이주민간 교류 등 주민들은 공간 '서로봄'을 통해 마을의 문제를 공유하고 해법을 모색했다. 공간은 마을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씨앗이었다.

#마을신문과 배움사랑방의 손춤

대전시청자미디어센터의 교육을 받고 만공 어린이들이 동네 놀이터를 촬영하고 있다. /서로봄 제공

'우리동네놀이터공작단'의 실험은 거침이 없었다. 대전시 사회적자본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타블로이드판형 8페이지 분량의 '별밭마을신문' 마중물호를 펴냈다. 주민들의 활동 기록이 오롯이 담긴 신문. 그때 제작에 참여했던 주민들이 '서로봄'을 지키는 공간지기로 남았다.

학하초등학교 등하굣길의 안전문제를 기사로 작성했던 김진영씨는 서로봄의 화요일을 책임지는 화요지기이면서 배움사랑방의 뜨개질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진영씨는 "주차, 쓰레기, 안전 등 마을의 문제를 주민 스스로 이야기하고 싶어 신문제작에 참여했다"며 "미디어는 마을 의제를 담아내고 공론화하는 효율적인 매개체였다"고 평가했다.

신문 창간의 기대는 잠시 내려놓았지만 김씨는 배움사랑방을 통해 여전히 마을 주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원하는 것을 마음껏 배울 수 있어 좋아요. 재능을 나누는 배움사랑방에서는 누구나 강사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수강생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배움사랑방에서 바느질과 캘리그라피를 연습하며 손춤을 추고 있다. /서로봄 제공

서로봄에선 뜨개질과 캘리그라피, 그림책 속 주인공 인형 만들기, 수채화 그리기, 비누 만들기, 자수, 커피교실 등 손으로 하는 모든 것을 '손춤'이라고 부른다. 주민들은 손춤을 추며 삶을 공유하고 마을 이야기를 풀어낸다. 손춤 추는 사람들로 붐비는 서로봄은 소통의 마당이면서 어른들의 놀이터가 된다.

#도전조차 설레는 만만한공작단

만만한 생물학자 체험을 마친 아이들이 집에 가기 아쉬워 갑천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다. /서로봄 제공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만만하게 시도하자'. 배움사랑방을 통해 탄생한 '만만한공작단'은 초등학생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서로봄의 어린이 동아리 이름이다. 줄여서 '만공'.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고학년까지 7명이 참여하고 있다.

경험디자이너 내지 숲해설가로 불리는 김효경씨가 만공의 도전을 돕고 있다. '부담스럽거나 무서울 것이 없어 쉽게 다루거나 대할 만하다'는 뜻의 '만만하다'는 아이들이 새로운 체험과 도전에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이 됐다.

만만한 생물학자, 만한한 시인, 만만한 환경운동가, 만만한 농부, 만만한 놀이연구가, 만만한 예술가, 만만한 요리사 등 결코 만만하지 않은 것들을 두려움없이 시도했다. 월평공원의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해 보고서를 쓰고, 기후변화와 세계 식량난에 공감하며 일회용품 없는 일주일을 살아봤다. 마을 텃밭에서 직접 농사도 지었다. 고구마와 땅콩, 오이, 고추, 가지, 상추, 부추 등 수확한 농작물만 20여 가지에 달한다.

만공 아이들이 폐타이어를 업사이클링한 놀이기구 '굴링'을 만들어 타고 있다. /서로봄 제공

세상에 없는 놀이를 연구하고, 동시 삽화를 그려 실제 동시집에 소개되기도 했다. 만공 아이들에겐 입지 못하게 된 청바지도 폐타이어도, 계란판과 고장 난 전자제품도 모두 놀이 재료가 된다.

김효경씨는 "서로 다른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관계를 맺고 마음을 열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모습을 지켜봤다"며 "만공을 통해 아이들은 용기를 배웠고 함께 고민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즐거움을 배웠다"고 말했다. 서로봄에서 '만공'의 아이들은 놀이 밥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가르치면서 성장하는 엄마학교

그림책 주인공을 인형으로 만드는 배움사랑방에서 엄마가 만든 선물을 받고 활짝 웃고 있는 김윤서 어린이. /서로봄 제공

배움사랑방이 어른, 만만한공작단이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라면 서로봄 엄마학교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어울려 놀고 배우는 열린 놀이터를 지향한다. 엄마들이 수업 계획안을 만들어 아이들 앞에서 설명회를 열면 아이들이 수강신청을 하는 시스템이다.

요가강사인 강희재씨는 키즈요가교실을 열었다. 첫째와 둘째가 '만공'에 참여하며 긍정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서로봄의 목요일을 지키는 목요지기가 됐다.

강희재씨는 "가르치면서 정작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저 자신이었다"며 "엄마학교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놀고 배우며 성장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김진이씨는 요리교실을 열었다. 별밭마을신문을 함께 만들며 서로봄에 합류했고 수요일을 책임지는 수요지기가 된 이후 엄마학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학하동의 한살림 마을모임을 주도하며 건강한 먹을거리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김진이씨는 "엄마학교와 만만한공작단을 통해 내 아이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고 마을이 학교가 될 수 있음을 간접 경험했다"며 "책방으로서의 서로봄, 놀이터로서의 서로봄, 공유공간으로서의 서로봄이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겐 계란판도 놀이 재료가 된다. /서로봄 제공

마을미디어, 손춤을 추는 배움사랑방, 그림책방, 개인의 책을 공유하는 공유책장과 교환 및 판매를 위한 책시장, 아나바다 벼룩시장, 엄마학교, 만만한공작단까지 서로봄을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그러나 결국 뿌리는 하나. 놀이터. 그것도 만만한 놀이터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을활동가로서 처음 공간을 제안했던 권은진씨는 "무엇이든 시도하고 도전할 수 있는 만만한 프로젝트 공간이 바로 서로봄"이라며 "아무쪼록 이 공간을 통해 더 많은 주민들이 자주보고 서로의 따뜻한 봄날을 응원하면서 마을과 함께 놀고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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