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
  • 중부매일
  • 승인 2019.02.13 14: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석교사 이야기] 이태동 음성 감곡초

'베티'는 어느 날 미술시간 그림그리기에 열중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망설이게 된다. 그 때 미술 선생님이 다가와 베티의 빈 도화지를 바라보고 "눈보라 속의 곰을 그렸구나." 라고 말한다. 베티는 당돌하게 "놀리지 마세요. 전 아무 것도 못 그리겠어요" 라며 부정적인 답변을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그려보라고 주문한다. 베티는 결국 수업 마칠 때 쯤 도화지 위에 연필을 내리꽂아 점 하나를 찍는다. 선생님은 도화지를 가리키며 "자! 이제 여기 네 이름을 쓰렴." 한다.

일주일 후 황금빛 액자에 그의 이름이 붙여진 점(point) 그림이 벽에 걸린다. 피터 레이놀즈(Peter H. Reynolds)의 동화책 점(point)에 나오는 이야기의 일부다. 베티는 그날 이후 자신이 '훨씬 멋진 점을 그릴 수 있어!'라며 수채화 물감을 가지고 더 많은 점 그리기 연습을 한다. 한 가지 색을 사용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색을 섞어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점들을 그려 나간다. 베티의 '점' 그림은 점점 발전해 전시회까지 열게 된다. 사소한 점 하나 찍은 그림을 소중히 여기며 베티에게 자신감 불어넣기에 성공한 미술 선생님의 의지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때로 예술 활동을 단순히 점수 매기기나 외양에 의존해 일부분만 평가할 우려가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 문제해결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인의 역량과 잠재적 소질을 고려한 맞춤식보다는 단기적, 결과 중심의 평가에 더 초점을 두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점'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올바른 교육현장의 방향성을 시사한다. 스스로 즐기며 새로운 환경의 인생을 영위할 수도 있는 높은 자기 결정권 그리고 그 영향력을 실감케 한다. 여러 개의 점은 결국 무한한 상상력을 담보로 개성과 창의력을 담아 훌륭한 작품성과 예술성을 도출한다. 안내자의 관용과 여유에 따라 배움에 놓인 대상들에게는 기쁨과 열정으로 감동을 남긴다.

이태동 음성 감곡초 수석교사
이태동 음성 감곡초 수석교사

작년에 학생들과 어떻게 하면 더 잘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교내 '인문책쓰기' 학생 동아리를 운영했다. 이 동아리는 4학년부터 6학년 희망자 중 점심시간, 쉬는 시간, 방과 후 수석교사실에 잠깐 들러 그림 그리고 글 쓰고 토의하는 비정기적 비형식적 모임이다. 출석 의무나 성과물조차 자유로운 그래서 어떤 구속이나 행정적인 면에 얽매이지 않는 중장기 순수 프로젝트였다. 최대한 나의 조급함을 버리고, 학생들이 표현하고 싶을 때 표현할 수 있는 타이밍에 착안해 분위기만 조성해 주자라는 의도를 담았다.

수석교사실은 동아리 학생들로 난장판이 되곤 했다. 낙서 아닌 낙서가 돼버린 작품에 학생들은 설명과 이해, 설득이 더 필요했는지 모른다. 학생들은 일기, 동시, 산문(생활문), 만화, 그림 등 순수 영혼의 결과물을 쏟아냈다. 서로 대화하고 돕는 과정에서 창작의 불을 지펴나갔다. 그 산물로 '글이랑 친구랑' 책이 발간되었다. 학생들은 뜻밖에 저자가 되던 날 책을 얼싸 안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눈 내리던 지난해 12월 어느 오후, 케이크를 준비해 조촐하게 '독자에서 저자로'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충북도교육청 독서담당 장학사의 배려로 전국학생독서 관련 도서전시회 출품의 영광까지 누렸다. 작가로 성장하는 학생들로부터 기다림의 교훈을 얻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